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반체제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59)가 사라진 것은 지난 10월 2일 오후 1시 15분경이었다. 결혼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서 사우디 총영사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은 그는 그렇게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그후 그의 모습을 보거나,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주 내내 납치 및 살해 혐의를 부인해오던 사우디 정부 측은 살해 정황이 담긴 증거가 속속 공개되자 못 이긴 듯 카슈끄지의 사망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사우디 왕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석연치 않은 해명만 내놓을 뿐이었다.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세계는 사건의 배후 인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33)를 지목하고 있는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우디 왕실은 왜 이토록 잔인하고 무모하게 암살 사건을 저지른 걸까. 그 배경에는 치열한 권력 다툼과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독재정권의 이면이 숨어있었다. 사우디 왕실을 가리켜 ‘살인 정권’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AP/연합뉴스
지난 10월 2일, 사우디 총영사관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만 해도 카슈끄지는 자신 앞에 놓인 잔인한 운명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중동 전문가로서 서방 세계에서 명망이 높은 데다, 200만 명에 가까운 트위터 팔로어를 두고 있는 유명한 정치 전문가인 자신을 아무리 사우디 정부라고 해도 감히 해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총영사실에 들어가자마자 사우디에서 급파된 열다섯 명의 암살단에게 붙잡혔던 그는 처참한 고문과 폭행 끝에 불과 7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왕실 경호원, 정보장교, 군인, 법의학 전문의 등으로 이뤄진 사우디 정부 측의 정예요원이었으며, 이런 사실은 터키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관련 음성 및 영상 파일을 통해 확인됐다.
당시 정황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녹취 파일의 세부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터키 정부 측은 하지만 “계획된 살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왕실의 최측근이 포함된 열다섯 명의 사우디 암살단이 카슈끄지를 고문한 후 살해했다. 범행 후에는 시신을 토막내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역시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적인 살인”이라고 나서면서 사우디 정부를 규탄했다.
그런가 하면 터키의 한 고위 관리는 영사관 내부에서 카슈끄지가 살해됐다는 ‘확실한 증거’를 수집했다고도 말했다. 예컨대 사건이 발생한 지 13일이 지난 10월 15일, 터키 경찰이 영사관 안을 조사하던 중 바닥의 일부가 새롭게 페인트칠 되어 있는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더욱 수상한 것은 사건 당일에 해당하는 영사관 내 CCTV의 영상이 모조리 삭제되어 있었고, 직원들이 그날따라 이유 없이 서둘러 퇴근했다는 사실이었다.
‘뉴욕타임스’와 터키 일간지 ‘예니샤파크’ 등에 일부 공개된 녹취록에 따라 당시 사건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카슈끄지는 총영사실로 들어서자마자 몇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있던 사우디 요원들에게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카슈끄지는 구타를 당했고, 손가락이 잘렸다. 이에 대해 중동 전문 온라인 뉴스 매체인 ‘미들 이스트 아이’는 “잘린 손가락은 작전이 성공했다는 의미로 빈 살만 왕세자에게 전달됐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녹취록에는 사우디 총영사가 “밖에 나가서 하시오. 당신들 때문에 내가 곤란하게 됐소”라고 간청하는 목소리도 담겨 있었으며, 이에 “사우디로 돌아가서 목숨이 붙어있고 싶으면 조용히 해!”라고 소리를 지르는 요원의 목소리도 녹음되어 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카슈끄지를 질질 끌어 책상 위에 올린 요원들은 잔인하게도 톱을 이용해 사지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를 지휘한 사람은 법의학자 겸 왕립의과대학의 고위관리인 살라 무함마드 알투바이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했으며, 다른 요원들에게도 음악을 들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토막난 시신들은 상자에 담겨 검정색 밴에 실린 채 영사관을 빠져 나갔다. 외교 번호판을 단 검은색 밴 차량을 포함한 수상한 차량 여러 대가 사우디 영사관을 빠져나가 500m 거리에 있는 영사관저로 이동하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이에 터키 정부는 토막난 시신이 관저 정원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했고, 수색 결과 신체의 일부와 심하게 손상된 카슈끄지의 얼굴이 발견됐다. 발견 장소는 관저 정원과 우물 안이었다.
이를 짐작케 하는 증언도 잇따랐다. 터키의 친정부 일간지인 ‘데일리 사바’는 18일자 신문에서 영사관저 이웃 주민들의 수상한 목격담에 대해 보도했다. 한 이웃 주민은 “12년째 이곳에 살고 있지만, 여태껏 관저에서 바비큐 파티를 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라고 말했다. 이에 ‘데일리 사바’는 아마도 시신을 소각할 때 나는 냄새를 위장하기 위해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런 암살 정황이 속속 공개되자 사우디 왕실은 궁지에 몰리게 됐다. 처음에는 카슈끄지가 두 발로 영사관을 걸어 나갔다고 주장했던 사우디 왕실 측은 빈 살만 왕세자가 직접 ‘블룸버그뉴스’를 통해 “언제든 영사관 안을 수색해도 좋다. 우리는 숨길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등 당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불리한 증거가 속속 공개되자 이내 “요원들과의 주먹싸움 끝에 실수로 사망했다”고 말하면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10월 2일 카슈끄지가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 그는 살아서 총영사관을 나올 수 없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살해 의혹이 불거진 지 18일 만에 사우디 정부는 카슈끄지가 살해됐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카슈끄지는 불법 작전에 의해 살해당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를 사전에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선긋기에 나섰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 나서서 “역사상 최악의 은폐 시도”라고 질타하자 입장이 곤란해진 빈 살만 왕세자는 직접 공개자리에서 “카슈끄지 살해 사건은 악랄한 범죄다. 모든 사우디 국민들과 인류에 고통스러운 일이다.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라며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왕실과 무관하다는 사우디 측의 주장과 달리 모든 증거들은 사실 사우디 왕실을 가리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 열다섯 명의 요원들의 정체가 그렇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최소 다섯 명은 ‘타이거 스쿼드’, 즉 ‘호랑이 부대’ 소속의 요원들로, 이 부대는 빈 살만 왕세자 휘하의 정예 부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랑이 부대’라는 이름은 ‘남부의 호랑이’라고 불렸던 아마드 아시리 소장과 연관이 있다. 예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아시리 소장을 가리켜 사우디 언론은 ‘야수’라고 불렀고, 그 역시 이 별명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호랑이 부대’의 주된 임무는 사우디 정부에 비판적인 인물을 암살하는 것이다. 이들은 빈 살만 왕세자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최정예 요원들로 이뤄져 있으며,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들이 선발된다. 암살 방식은 위장 교통 사고, 방화, 정기 건강검진시 에이즈 바이러스나 치명적인 바이러스 주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왜 체포가 아닌 암살일까. 이에 ‘미들 이스트 아이’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할 경우, 국제적으로 석방 압력이 거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체포 대신 비밀리에 살해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이럴 경우 대개는 평범한 사고사로 위장된다고 매체는 전했다.
실제 이런 암살 작전으로 의심되는 사건은 여럿 있었다. 개인 비행기로 사우디를 탈출하려다가 공중에서 비행기가 폭파돼 사망한 만수르 빈 무크린 왕자의 경우가 그렇다. 당시 사우디 왕실은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추측에 의하면 ‘호랑이 부대’의 일원이자 사우디 왕립공군 중위인 메샬 사드 알 보스타니가 헬리콥터 미사일로 왕자의 비행기를 격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판사였던 술레이만 압둘 라만 알-투니얀은 건강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그만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하고 말았다. 알-투니얀은 빈 살만의 ‘2030경제 비전’에 대해 강력히 반대해왔던 인물로, 당시 그의 살인 작전은 빈 살만이 직접 명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프라인에 ‘호랑이 부대’가 있다면 온라인에는 ‘트롤 부대’가 있다.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은 주로 SNS 등 온라인을 통해 표적들에게 악성 댓글을 달거나 협박하는 식으로 활동한다. 카슈끄지 역시 생전에 이런 공격의 피해자였다. 주변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매일 아침 밤새 온라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점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온라인 부대의 악성 글들이나 협박 메시지들을 확인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에 카슈끄지의 친구들은 자주 전화를 걸어서 그의 안전과 정신상태를 확인해야 했었다.
사우디 정부를 위해 일하는 ‘트롤 부대’는 리야드 인근의 사무실이나 집에서 활동하며, 수백 명의 젊은이들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예멘 전쟁이나 여성 인권과 같은 민감한 주제부터 반체제 탄압에 걸친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협박, 공격, 위협할 대상의 명단을 서로 공유하고, 이들에게 빈 살만 왕세자가 칼을 들고 춤을 추는 이미지와 같은 협박용 게시물들을 전송한다. 또한 매일 할당된 양만큼 트위터에 친정부 성향의 글을 올리는 것도 이들의 임무다. 만일 신고로 계정이 차단되면 해당 계정을 폐쇄하고, 새 계정을 만든다.
이들이 주로 트위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유는 지난 2010년 아랍의 봄 혁명 당시 중동 지역에서 트위터가 핵심 역할을 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이들의 목소리가 민주화로 이어지길 바라는 사우디인들의 바람과 달리 트위터는 현재 사우디 정부의 억압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배후인물로 추정되는 빈 살만 왕세자. AP/연합뉴스
이에 카슈끄지는 사망 전에 온라인 학대에 대항해 싸우고 빈 살만 왕세자가 국가를 잘못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온라인 운동을 시작한 바 있었다. 지난 9월에는 캐나다에 망명 중인 반체제 인사인 오마르 압둘아지즈에게 5000달러(약 570만 원)를 송금하면서 후원하기도 했었다. 압둘아지즈는 현재 트위터에서 사우디 정부의 온라인 부대에 맞서 싸우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자 벌떼’라고 부르고 있으며, 카슈끄지는 사망하기 11일 전, 자신의 트위터에 “벌들이 몰려오고 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었다.
온라인 부대의 온갖 협박에도 꿋꿋이 투쟁했던 사우디 반체제 인사들은 이번 카슈끄지의 살해 사건으로 공포에 떨 수밖에 없게 됐다.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목숨을 건졌을 뿐 자신들 역시 언제 어떻게 살해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실제 비슷한 암살 시도를 경험했다고 말하는 인물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사우디 정부 측 사람들이 자신들을 사우디 외교 공관으로 유인하려고 했다고 말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압둘아지즈 역시 그랬다. 현재 유튜브를 통해 사우디 지도부를 풍자하는 방송을 하고 있는 그는 올해 초 사우디 관리들로부터 “새로운 여권을 발급 받아야 하니 캐나다 주재 사우디 대사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를 함정이라고 직감했던 압둘아지즈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사우디에 있던 그의 형제들과 몇몇 친구들이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지타운에 망명 중인 사우디 학자인 압둘라 알라우드 역시 비슷한 음모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지난해 사우디 대사관에 여권 갱신 신청서를 제출했던 그는 당국으로부터 기본적인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하니 사우디로 잠시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알라우드는 “그들은 내게 임시 여권을 제공했지만 나는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면서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호주로 추방된 여성 인권운동가인 마날 알 샤리프는 지난해 9월, 빈 살만의 측근이자 최고 전략가인 사우드 알카타니가 사우디 대사관으로 유인하려는 작전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나 역시 희생자가 됐을 것”이라며 공포에 떨었다.
이런 사건들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실제 유엔난민기관에 따르면, 빈 살만이 집권한 이후 사우디에서는 망명 신청 건수가 2015년 575건에서 2017년 1256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와 관련, 기자 보호 위원회의 셰리프 만수르는 ‘카네기 중동 센터’를 통해 “카슈끄지 살해 사건을 통한 가장 강력하고 오싹한 메시지는 이제는 아무도 사우디의 잔혹한 영향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조지타운의 알라우드 역시 “카슈끄지 사건은 왕실과 조금이라도 의견차이를 보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이 무모한 행동들이 과연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효과가 있을까? 카슈끄지의 목소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커졌다”라고 꼬집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카슈끄지는 누구? 숨진 다이애나 비 연인과 6촌관계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으로서 왕실과 정부에 비판적인 칼럼을 써온 카슈끄지는 지난 2017년 9월, 미국으로 건너온 후 ‘워싱턴포스트’ 등을 통해 중동 전문 칼럼을 기고하고 있었다. 특히 빈 살만 왕세자와 살만 국왕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왔으며, 생전에 썼던 마지막 칼럼에서는 “아랍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면서 독재적인 사우디 왕실을 비난했다. 중동 전문가로서 특히 서방 세계에서 인기가 높았던 그는 영국과 미국의 주요 TV 방송에 고정 출연하는 패널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친척 가운데는 서방 세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인사들이 더러 있었다. 가령 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억만장자 무기 거래상인 아드난 카슈끄지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한때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부호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한때 순자산이 40억 달러(약 4조 5000억 원)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자랑했었다. 하루에 25만 달러(약 3억 원)씩 펑펑 쓰고 다녔다는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하지만 잇단 사업 실패에 따른 경영난과 미 정계의 ‘이란-콘트라 사건’에 연루되면서 그의 몰락은 시작됐다. 결국 1989년 사기죄로 기소됐으며, 7000만 달러(약 800억 원) 짜리 호화 요트를 당시 부동산 갑부였던 도널드 트럼프에게 3000만 달러(약 340억 원)의 헐값(?)에 팔아 넘기는 등 체면을 구기기도 했었다. (위) 80년대 아드난 카슈끄지와 바버라 월터스. 세계 최고 부호로 이름 날렸던 아드난은 자말 카슈끄지와 친척 관계다. (아래)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비와 도디 파예드. 파예드는 카슈끄지와 6촌 사이다. 1990년대에 카슈끄지는 아프가니스탄, 알제리, 쿠웨이트, 수단 등 중동 각지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1987년~1995년까지 젊은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를 통해 사우디 최고의 언론인으로 추앙받기도 했었다. 한때 사우디 정부 고위 관리들의 고문으로도 활동했으며, 오랜 시간 엘리트 지도층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가 집권했던 지난해부터는 급격히 정부와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유인즉슨, 빈 살만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막강한 기업인들과 왕족들을 체포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슈끄지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왕실과 카슈끄지의 사이는 더욱 소원해졌다. 결국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카슈끄지는 사우디 왕실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써왔고, 그 결과 왕실의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사우디 왕실이 처음부터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AFP는 카슈끄지의 친구의 말을 빌어 “살해 몇 주 전 빈 살만은 카슈끄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었다. ‘적은 가까이에 두라’는 오래된 격언에 따라 빈 살만은 카슈끄지에게 사우디로 돌아올 경우 왕실고문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카슈끄지는 이를 함정으로 여기고 사양했으며, 그의 이런 거절은 왕실에게는 모욕으로 비쳤다. 사우디 왕실이 카슈끄지를 처형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올해 초 미국에서 ‘현 아랍세계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당을 설립했기 때문이었다. 빈 살만은 이슬람교 정치 야당이 출현할지 모른다는 악몽이 카슈끄지에 의해 현실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사우디 왕실의 따가운 시선을 직감하고 있었던 걸까. 죽기 몇 달 전부터 카슈끄지는 주변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의 이런 예상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주] |
사우디 왕실은 지금? 권력투쟁 극심 왕자 3명 행방묘연 사우디 아라비아는 국왕이 입법, 사법, 행정 등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세계에서 드문 전제군주국가다. 왕은 국왕인 동시에 종교 수장이며, 이에 따라 왕은 곧 법이다. 국가 수장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는 없으며,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도구 역시 사실상 없다. 다만 국왕의 의사결정을 돕는 자문위원회만 존재할 뿐이다. 1927년, 리야드 출신의 이븐 사우드 국왕이 국가를 통일하고 1932년 초대 국왕에 오른 후 현재까지 사우드 왕가는 총 일곱 명의 국왕이 나라를 통치했다. 현재는 지난 2105년 왕위에 오른 제7대 국왕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통치하고 있다. 살만 국왕은 초대 국왕의 25번째 아들이자 국왕이 가장 아끼던 ‘일곱 왕자’ 가운데 여섯 째다. 이븐 사우드 국왕에게는 스물두 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모두 45명의 아들(36명 생존)과 최소 60명의 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자만 1000명이 넘는다. 이밖에도 현재 사우디에는 총 2만 2000여 명의 왕족들이 있으며, 이 가운데 왕자들은 7000명가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인구 1000명 가운데 한 명은 왕족인 셈이다. 실종된 왕자들. 왼쪽부터 투르키 빈 반다르, 술탄 빈 투르키 빈 압둘아지즈, 사우드 빈 사이프 알-나사르. 하지만 정권을 잡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족들은 현재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심심치 않게 뉴욕과 런던 등지에서 수천만 달러어치 명품을 쇼핑하는 사우디 왕자나 공주를 본다거나 혹은 조용한 미국의 시골 동네 병원에서 대규모 수행원을 거느리고 진찰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나타나는 사우디 왕자를 볼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사우디 왕족들은 방대한 석유 매장량 덕분에 대대손손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전체 사우디 왕가의 순자산은 1조 4000억 달러(약 1560조 원)이며, 이 가운데 가장 부유한 사람은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다. 기업가이자 투자자인 그의 총자산은 280억 달러(약 32조 원)며, 2015년에는 부자 명단 가운데 34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다. 살만 국왕의 경우에는 170억 달러(약 19조 원)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치열한 권력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특히 2015년 살만 국왕이 집권한 후부터 이런 권력 다툼은 더욱 거세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즉위 3개월 만에 살만 국왕은 자신에게 위협적인 인물들을 집단 처형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처형된 반대파 인물들은 현재 150명이 넘고 있다. 지난해에는 권력 다툼의 소지가 있는 왕자들, 기업 경영인, 전현직 고위인사들 350명이 호텔에 구금된 채 고문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이는 모두 국방장관이자 왕세자인 빈 살만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 빈 살만은 부패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재산을 헌납할 것, 왕실에 충성할 것 등의 맹세를 받은 후에야 이들을 석방했다. 사실 빈 살만의 왕세자 책봉은 사우디 왕실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 아버지에서 아들로 왕위가 승계되는 다른 군주국가와 달리 사우드 왕가는 지금까지 초대 국왕의 아들들이 차례대로 왕위를 물려 받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었다. 하지만 이는 5대 국왕인 파흐드가 왕의 아들들에게도 승계가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면서 바뀌었다. 이밖에도 파흐드 국왕은 왕권으로 왕세자를 임명하고 박탈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살만 국왕은 조카인 무함마드 빈나예프의 왕세자 지위를 박탈하고 자신의 아들인 빈 살만을 후계자로 지목할 수 있었다. 현재 빈 살만은 아버지로부터 국가 경제를 개혁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 받은 상태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 만큼 그가 펼치는 개혁 정책은 한편으로는 파격적이면서도 혁신적이다. 가령 여성들의 운전을 허용한 점, 이스라엘 편에 서서 이란에 대항하고 있는 점, 종교 경찰을 축소한 점, 서구 영화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한 점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불쾌한 진실을 감추려는 겉치레일 뿐이다’라며 불편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은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감추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우디 왕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강력한 독재정권이라고 규탄하고 있는 사람들은 왕실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조용히 살해하는 ‘살인 정권’이라며 맹비난하고 있다. 이렇게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세 명의 사우디 왕자들이 미스터리하게 사라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실종된 시점이 모두 2015~2016년 사이라는 점도 충분히 의심스럽다고 이들은 말한다. 지난 2016년 2월, 스무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이집트 카이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술탄 빈 투르키 빈 압둘아지즈 왕자는 그 이후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비행기에 동승했던 수행원의 증언에 따르면, 술탄 왕자는 공중에서 납치됐으며, 당시 비행기가 카이로가 아닌 리야드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전직 경찰서장이었던 투르키 빈 반다르 왕자 역시 현재 실종된 상태다. 유산 상속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투옥됐던 그는 2012년 석방된 후 파리로 피신했고, 그후 유튜브를 통해 사우디의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여왔었다. 하지만 지난 2015년, 모로코를 방문했을 당시 ‘이 XXX야, 너를 끌고 올 테다’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받은 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모로코의 한 신문은 그가 모로코에 구금된 후 사우디 측의 요구에 따라 리야드로 추방됐다고 보도했다. 평소 투르키 왕자는 친구에게 “나는 내가 납치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나를 암살할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 왕자는 또 있었다. 사우드 빈 사이프 알-나사르 왕자가 사라진 것은 지난 2015년, 살만 국왕에 대한 쿠데타를 촉구하는 두 통의 편지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후였다. 2014년부터 트위터에 사우디 왕정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올려왔던 그는 같은 해 모하메드 모르시 이집트 대통령의 전복을 지지하는 사우디 왕족들에 대한 기소를 요구하기도 했었다. 세 왕자의 실종과 관련, 사우디 왕실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들은 아마 지금쯤 지하 감옥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