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임시기사총회 모습.
[일요신문] 제5차 임시기사총회가 지난 10월 29일 한국기원에서 열렸다. 프로기사 204명은 기사회장 손근기 불신임안과 유창혁 사무총장, 송필호 부총재 해임건의안에 각각 찬반투표했다. 개표결과 기사회장 불신임안은 반대 124표로 부결되었지만, 해임건의안은 부총재가 찬성 141표, 사무총장도 찬성 124표로 통과되었다. 가결된 해임건의안은 이사회를 거쳐 한국기원 홍석현 총재에게 전달된다.
이날 오후 한 프로기사가 기자에게 직접 카카오톡을 보내왔다. 갓 중년에 접어든 남자프로기사가 총회 진행을 지켜보며 느낀 진솔한 감상을 적었다. 익명을 요구했지만 글은 잘 다듬어 올려달라는 요청을 덧붙였다. 편의상 프로기사 G라고 하자. G가 보낸 글에 다른 프로기사들에게 들은 발언을 더해 기사총회 현장 모습을 다시 그렸다.
손근기 기사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손 기사회장 불신임안은 부결됐다.
오랜만에 기원에 갔습니다. 반가운 얼굴이 참 많았습니다. 전체기사가 참가하는 대회가 없다보니 요즘은 기사들끼리 얼굴 한번 보기 어렵습니다.
기사총회를 오전 11시에 여는 것도 역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아침부터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오랜만에 들른 한국기원 2층 대회장은 프로기사들로 북적입니다. 줄을 서서 출석명부에 이름을 쓰고 빈자리를 찾았습니다. 나눠주는 커피와 빵을 하나 손에 쥐고 단상을 바라봅니다. 인원이 200명이 넘으면서 자리가 없어 뒤에 선 프로기사도 꽤 있습니다. 오전 11시 20분, 최명훈 부회장이 의사봉을 들고 총회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번 임시총회 투표 안건은 세 가지로 손근기 기사회장에 대한 불신임, 한국기원 송필호 부총재와 유창혁 사무총장에 대한 해임 건의입니다. 불신임 당사자인 손근기 회장과 이 안건을 처음 발의한 박지연 프로가 서두를 열었고, 찬성과 반대의견을 가진 기사들이 차례로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기사회장을 탄핵해선 안 된다. 그동안 대의원회가 무엇을 대변하지 못했나?”라는 의견. 또 반대로 “기사회장과 사무총장은 프로기사들 전체 의견을 대변하는 자리다. 만약 다른 생각이 있다면 먼저 기사들에게 설명과 설득을 해야 했다”, “지난 기사총회에서 선배기사를 욕보인 것만으로 탄핵사유에 해당한다” 등 각자 의견을 개진합니다.
임시기사총회 투표 용지.
기사회장 불신임 찬반토론에 이어 부총재, 사무총장 해임건의안도 1시간 넘게 이야기했습니다. 대의원회는 송필호 부총재 해임건의를 안건으로 상정한 이유로 “(중략) 결국 기원의 인사 및 조직 업무를 전횡하고, 총재 기업의 계열사처럼 조직을 운영함으로써 바둑계 발전과 프로기사의 권익 확보 등 기원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했고, 기원, 프로기사, 바둑계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라고 문서로 밝혔습니다.
일반 기사들 발언에는 손근기 회장, 유창혁 사무총장 안건에 비해 송필호 부총재를 옹호하는 내용이 적었습니다. 원로기사 Y는 “난 송필호 부총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오늘 같은 날은 이 자리에 나와서 인사하고 사과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중년기사 Y는 일어서서 “지금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송필호 부총재 등 일부 세력에 기원행정과 프로기사들이 종속되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다”라고 강경 발언을 합니다.
찬반 주장을 들으며 한국기원의 역할과 의무를 되돌아봤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인물을 집행부에 모셔도 100%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일을 추진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불만이 생깁니다. 다만 견제 없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진리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오후 1시 반, 개표시간이 되자 2층 대회장을 가득 메운 프로기사들이 ‘찬성, 반대’라고 낭랑하게 한 표씩 읽어가는 목소리에 집중하며 숨죽였습니다. 개표 즉시 대형모니터에 찬반 숫자가 올라가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이날 임시총회에 프로기사 총 204명이 투표했습니다. 개표 결과 부총재 해임건의안에 141명, 사무총장 해임건의안은 124명이 찬성입니다. 기사회장 불신임안은 반대 124표를 받아 부결되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프로기사들이 다른 집단에 비해 보수성향이 강해 집행부 해임안 건의가 통과하리라고 상상하진 못했습니다.
과거 기사총회에선 고성이 오가는 등 부끄러운 모습도 있었는데 이 결론으로 격렬하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대놓고 기뻐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로 착잡한 눈길로 인사를 나누며 기사총회는 끝났습니다.
송필호 부총재 해임건의안 표결 결과. 송 부총재와 유창혁 사무총장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 통과돼 한국기원 이사회로 공이 넘어갔다.
기사총회에서 의결한 해임건의안은 아직 ‘건의안’일 뿐입니다. 이후 한국기원 이사회와 임면권자인 홍석현 총재 결정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벌써 후임 사무총장 누구냐는 말들이 기사들 사이에서 나옵니다. K, C 등으로 시작하는 구체적인 이름들도 들립니다. 혹여 새로운 사무총장이 나와도 단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슈퍼맨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물보다 중요한 건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올바른 제도의 정착이라 생각합니다.
집행부 구성문제는 모든 프로기사가 관심을 가지는 현실입니다. 실제로 한국기원 집행부가 가는 방향에 따라 바둑계 전체가 요동쳤습니다. 집행부는 당연히 프로기사의 이익을 살펴야 하지만, 이들이 정의하는 바둑계가 한국기원에 국한되어선 안 됩니다. 프로기사는 바둑이란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호막입니다. 그러나 바둑 생태계 전체 외연이 넓어져야 프로기사라는 존재도 안전하게 됩니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프로기사들 가치관도 달라져야 합니다. 톱랭커도 이제 팬을 대하는 서비스를 잘 익혀야 하고, 성적이 저조한 기사라면 더욱 교수법을 익히고 외국어도 배워 부지런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야겠지요. 뒤에서 바둑 생태계를 넓히고 스폰서도 체계적으로 관리해 프로기사와 연결해주는 한국기원의 역할도 필요합니다.
마음이 착잡합니다. 그러나 이번 투표가 곪은 환부를 드러내고 새살이 돋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쌀쌀한 날씨에도 시위에 나설 만큼 한국기원을 걱정해주신 열성 바둑팬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프로기사 G 올림.
박주성 객원기자
10월 29일 임시기사총회 투표결과 손근기 기사회장 불신임안: 찬성 77, 반대 124, 무효 2, 기권 1 송필호 부총재 해임건의안: 찬성 141, 반대 57, 무효 5, 기권 1 유창혁 사무총장 해임건의안: 찬성 124, 반대 76, 무효 3, 기권 1 *총 투표 인원 204명, 103표 이상 안건 확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