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말 이마트 PB(자체브랜드)상품인 가습기 살균제 ‘이플러스’를 구입해 사용한 A 씨(여·59)는 이듬해 7월부터 호흡곤란 등 건강 이상증세를 보였다. A 씨는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검진 결과 A 씨의 폐는 이산화탄소를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만성호흡 부전 증상이었다. A 씨는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할 만큼 폐가 건강했다. 하지만 현재는 목을 절제해 호스로 산소를 투입하고, 하루에 최소 2번은 기계를 통해 가래를 빼고 있는 처지다. 폐에 있는 염증·세균 치료를 위해 항생제도 매일 복용한다. A 씨의 남편은 “병원에선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며 더 이상 내원하지 말고 집에서 편히 있는 게 나을 것이라고 진단했다”고 말했다.
B 양(여·14)은 정도만 다를 뿐 A 씨와 비슷한 질환 증상을 보였다. B 양은 태어날 때부터 호흡이 불편했다. B 양의 어머니가 B 양을 출산하기 두 달 전부터 애경산업이 유통한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 메이트’를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B 양은 지속되는 천식증상과 호흡곤란 등으로 10년간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현재 몸 건강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폐 기능은 매우 떨어진 상태다. 오랜 약 복용의 부작용으로 틱 장애를 겪기도 했다. B 양의 어머니는 “남편은 평생 걸리지 않던 천식증상을 보였고, 나는 한번 감기에 걸리면 잔기침이 2달 넘게 지속됐다”고 말했다.
왼쪽은 A 씨의 병원 소견서, 오른쪽은 B 씨의 담당 의사가 작성한 진료의뢰서. A 씨와 B 씨 모두 의료진으로부터 호흡기 질환을 진단받았다.
A 씨와 B 양이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는 공통적으로 SK케미칼이 생산한 살균제 성분인 CMIT‧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를 공통적으로 함유하고 있다.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올 10월 15일 기준으로 해당 성분을 함유한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폐질환을 진단받은 총 환자 수는 346명에 이른다.
하지만 SK케미칼을 포함해 CMIT‧MIT를 함유한 제품을 제조‧유통한 애경산업, 이마트 등은 그 어떤 법적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2012년 2월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동물 실험에서 해당 성분의 흡입 독성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옥시레킷벤키저(옥시),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이 제조·유통한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PHMG·PGH(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의 유해성만 입증됐다. 지난 2016년 환경부도 CMIT‧MIT와 폐질환 간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검찰은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SK케미칼 등에 대한 수사는 진행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폐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들 기업들은 민형사상·배상 책임에선 완전히 빠진 셈이다.
SK케미칼은 그동안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보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꼼수만 부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K케미칼은 피해 가족들을 비공식적으로 만나면서 자사와의 조정을 권유하거나 병원비 지원 등으로 일부 피해자를 회유했다. 앞서의 B 양 어머니는 “SK 직원들은 피해자들의 숱한 문제 제기에도 보상이나 배상이란 단어를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CMIT‧MIT 성분이 유해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SK케미칼 등이 더 이상 피해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28일 대구가톨릭대 GLP(Good Laboratory Practice:비임상시험기관)센터의 박영철 독성학 박사 등은 해당 성분이 체내에 유입될 수 있으며 그 유해성이 크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연구진은 관련 논문을 통해 “임신한 쥐의 기도에 CMIT‧MIT를 투입한 결과, 해당 성분이 폐를 통해 전신 혈관계와 태반 등으로 이동했고 이는 뱃속에 있는 새끼 쥐의 사산에도 영향을 끼쳤다”며 “해당 성분은 미생물을 제외하고 종 차이 없이 동물, 사람 등에게 유해할 수 있는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2년 서울아산병원 연구팀이 CMIT‧MIT 성분의 폐 손상 유발 가능성을 실험한 연구결과를 보충, 뒤이은 셈이다.
SK케미칼이 생산한 가습기 살균제 제품들. 연합뉴스.
박천규 환경부 차관은 이와 관련한 문제 지적이 끊이지 않자 지난 10월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CMIT‧MIT 함유 제품 사용자들에게도 PHMG 함유 제품을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질환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그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며 “이에 따라 SK와 애경 등도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6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정부와 SK케미칼 등 22개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 측 소송 대리인 최재홍 법무법인 자연 변호사는 검찰이 의지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수사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옥시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뤄졌을 당시 검찰은 독성학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와 PHMG 성분이 들어간 제품 사용 피해자들의 피해사실을 근거로 수사에 착수했다”며 “이번에 새롭게 나온 연구결과와 CMIT‧MIT 성분이 든 제품 사용으로 폐질환 등을 겪고 있는 11명의 피해자를 근거로 둔다면, 옥시 때처럼 SK케미칼에 대한 검찰 수사는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SK케미칼 등은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SK케미칼 관계자는 “현재 정부의 추가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아직 구체적인 입장이나 계획을 밝히긴 어렵다. 양해 부탁드린다”며 “새로 나온 연구 보고서는 입수하는 대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애경산업 관계자는 “최근 제기된 연구 결과 등과 관련해 뭐라 말씀드리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
정부 탓도 있다…“영어 문제를 수학 답안지로 채점한 셈” 일각에선 SK케미칼 등이 그동안 면죄부를 받은 데엔 정부 탓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앞서의 박영철 독성학 박사는 “독성실험은 크게 ‘제품 인허가 등을 위해 인체 노출 시 제품 안전성 여부를 평가하는 것’과 ‘사고 발생 후 새로 개발한 독성시험 모델에 따라 그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것’ 2가지로 나뉜다”며 “정부는 보편화된 독성시험 가이드라인에 따라 지금까지 전자의 실험만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선 CMIT‧MIT의 독성여부나 사고 원인을 제대로 짚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초 환경부가 살균제 성분 평가기준을 잘못 세웠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SK케미칼이 각 기업에 생산‧공급한 살균제 성분인 CMIT‧MIT와 옥시 제품 등이 함유하고 있는 PHMG‧PGH는 서로 화학성분, 용도 등이 달라 별개의 물질로 분류된다. 하지만 환경부는 두 성분에 대한 유독성 평가 기준을 각각 따로 마련치 않고, 옥시 제품 성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모든 살균제 성분의 유해성을 평가했다는 것.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C 씨는 “이렇게 할 경우 SK케미칼이 제조한 가습기 메이트 제품 등의 살균제 성분은 당연히 유해성이 드러날 수 없다”며 “이는 영어 문제를 수학 답안지로 채점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C 씨는 이와 관련해 지난해 12월 환경부를 대상으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