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아무개 씨는 17년 만에 억대 채무 폭탄을 맞았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지난 10월 29일 경기도 시흥에서 만난 서 아무개 씨(47)는 현재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서 씨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연이어 황당한 일을 겪고 있는 중이다. 서 씨는 지난해 8월 느닷없이 법원으로부터 카드사용 대금과 그 연체 대금을 포함해 총 1억 원이 넘는 채무를 갚으라는 강제집행명령을 받았다.
놀랍게도 문제의 신용카드는 2000년 연말에서 2001년 연초 사이 발급 및 사용된 것이었다. 무려 17년 만에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카드대금과 연체료를 갚으라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서 씨는 과거 형편이 어려운 시절, 본인이 혹시 잊고 있던 카드채무가 남아 있었나 싶었지만 확인 결과 본인이 전혀 모르는 카드발급 및 사용내역이었다.
서 씨가 기자에게 공개한 당시 카드 가입서와 사용내역에 실마리가 있었다. 가입서엔 A 사가 직장과 발급 주소지로 기재돼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서 씨는 2000년경 지역 고용청을 통해 한 달 동안 제조업체인 A 사에 운전직으로 취업한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서 씨는 고용청을 통해 취업을 했음에도 굳이 ‘연대보증서’를 취업 서류로 요구한 A 사의 태도가 찜찜해 한 달 만에 일을 그만뒀다.
문제의 카드 내역을 살펴보니, 본인이 퇴사한 이후 A 사 근처에서 사용된 기록이 잡혀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연락처로 기재된 휴대전화 역시 누군가 서 씨 본인의 명의로 개통한 것이었다. 누군가 서 씨의 명의를 도용해 카드를 발급해 사용하고, 서 씨 명의의 휴대전화를 개통해 아예 서 씨에게 연락이 닿지 않게끔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주기적으로 서 씨 명의의 카드 가입자 주소와 역시 서 씨 명의의 휴대전화 번호를 주기적으로 바꿔가며 ‘관리’를 한 흔적도 드러났다.
서 씨는 “카드 사용 내역을 보면 과거 A 사가 지정한 주유소를 비롯해 A 사 근처에서 지출된 것”이라며 “문제의 휴대전화도 당시 회사 사람이 소개해 줬던 대리점에서 개통된 것이었다. 결국 취업 과정에서 내 신분 관련 서류를 제출받은 A 사가 내 명의를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 씨는 부랴부랴 당시 가입 서류의 필적이 본인의 것과 다름을 증명하기 위해 필적 감정을 의뢰했고, 당연히 서 씨 필적이 아님이 드러났다. 지난해와 올 초가 되어서야 서 씨는 ‘명의도용’ 사실을 인정받고, 앞서의 카드채무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카드 문제를 해결하고 얼마 안가 채권회사에서 수 건에 해당하는 캐피탈과 저축은행 대출 채무를 이행하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약 4000만 원에 해당하는 채무였다. 알고 보니, 누군가가 서 씨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 캐피탈을 쓴 것이었다. 이것 역시 17년여 만에야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계좌 거래신청서에도 앞서의 카드 가입서와 같이 A 사와 그 주소가 기입돼 있었다.
서 씨는 “현재 대출 채무는 없어지거나 흡수된 캐피탈 및 저축은행사라 그 서류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라며 “일부는 채권보유사와 협의해 내 돈을 들여 막았고, 나머지는 신용회복 상환을 통해 내가 갚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또 다른 건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서 씨가 그 책임을 묻고 있는 A 사는 너무 오래전 일이고, 중간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도울 방법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에 서 씨는 관할 소방서에 A 사가 주장한 화재발생 기간의 화재 정보 조회를 요청했지만, 소방서는 정보가 ‘부존재’함을 통보했다고 한다.
기자는 A 사에 이에 대한 입장 및 해명을 요구했지만, A 사 관계자는 “불과 두 달 전에도 이와 관련해 서 씨의 신고로 경찰이 다녀갔고, 모두 설명 드렸다”라며 “너무 오래된 일이고 화재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선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서 씨는 “명의도용 소송을 하고 싶어도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할 수 없다”라며 “나도 현실적으로 A 사로부터 보상받을 길이 없는 걸 안다. 다만 A 사로부터 ‘인정’과 ‘사과’를 받고 싶을 뿐”이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인사과 옛 동료가 뒤통수…“회사에도 공동 책임 물을 수 있다” 서 씨는 누군가 철저한 관리를 통해 본인조차 공소시효가 한참 지나서야 범죄 피해사실을 인식하게 된 극단적인 사례다. 서 씨처럼 전 직장의 퇴사자 명의도용으로 피해를 입은 사례는 의외로 많았다. 커뮤니티 등을 통해 사례를 수집한 결과 이런 경우도 있었다. 20대 여성 B 씨는 4년 전 한 회사의 경리로 일을 했다. 사 측의 계속되는 탈세 목적 이중장부 서류 작성 요구에 B 씨는 결국 회사를 떠났다. 그런데 몇 년 후 한 자동차 리스 업체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채무변제 요구를 받게 된다. 그동안 납입하지 않았던 수천만 원 상당의 자동차 리스 비용을 지불하라는 통보였다. 알고 보니, 퇴사한 회사 측에서 B 씨가 입사 당시 제출한 운전면허 사본 명의를 도용해 자동차를 장기 리스하고 비용을 B 씨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뒤늦게 B 씨는 노동청에 이를 신고했지만, 문제는 B 씨가 이를 스스로 증명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 측의 실무 담당자 차원에서 ‘명의도용’ 범죄가 이뤄질 경우는 더 복잡하다. 지난해 30대 남성 C 씨는 약 8000만 원에 해당하는 채권추심을 받게 된다. 알고 보니, 옛 직장 내 인사정보를 다루던 동료 직원이 본인 몰래 명의를 활용해 계좌를 개설하고 불법대출까지 받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미 신용불량자 신분이던 옛 직장 동료는 C 씨에게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C 씨는 옛 직장 동료를 고소하는 한편, 관리 소홀과 관련해 사 측에 책임을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옛 직장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사 측은 그저 ‘개인의 일탈’로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 측이 피고용인들의 신상과 명의 정보를 너무나도 허술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특히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대부분 인사정보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조차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곱씹을 부분이다. 기자와 통화한 김한규 변호사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참담한 상황”이라며 “보통 사문서 위조에 대한 범죄는 공소시효가 7년이기 때문에 앞서 서 씨 사례의 경우 회사에 책임을 묻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 변호사는 “다만 C 씨의 경우는 사 측이 ‘개인의 일탈’이라 주장하지만 다툼의 여지가 많다”라며 “분명 회사 소속의 인사자료를 담당하는 사용자가 벌인 일이고,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이 있기에 사용자에게도 공동 피고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