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박정훈 기자
검찰 수사는 일단 한 고비를 넘겼다. 10월 27일 사법농단 ‘키맨’으로 꼽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되면서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선 회의적 시선도 만만치 않긴 하다.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밝힌 임 전 차장이 입을 닫을 경우 수사는 난항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연이은 영장 기각으로 거센 비판에 휩싸인 사법부가 전략적 판단으로 임 전 차장 구속영장을 통과시켰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단 한 발 물러선 뒤 재판에서 두고 보자는 노림수가 담겨있다는 얘기다.
검찰의 목표는 분명하다. 사법농단 ‘몸통’으로 지목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고위 인사는 “중앙지검 특수부가 가용할 수 있는 검사와 수사관들 대부분이 사법농단 수사를 맡고 있다. 규모만 놓고 봤을 때 역대급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 정도 인력을 쏟아 부었다는 것은 그만큼 수사 의지가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정도를 사법처리하지 않고선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로선 사법부와의 갈등 국면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건 초반 검찰이 수사를 망설였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충격적인 재판 거래 의혹을 접한 국민들 여론이 악화되면서 검찰의 스탠스 역시 변했다. 정치권에선 여권 핵심부의 강경한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청와대와 민주당 친문 실세 인사들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 이뤄진 사법농단 사건을 뿌리 뽑지 않으면 사법부 개혁을 시작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법조계에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처리를 기점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이 본격적인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그 핵심은 양승태 대법원 체제에서 선고된 판결의 전수조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판사들의 판결을 되짚어보고, 정치적 외압 여부 등 문제가 있었던 것은 바로잡겠다는 의지다. 실제로 과거 정권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몇몇 판결 사례들에 대해선 수집 및 분석 절차가 이미 끝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보다 더 범위를 넓힌 작업이 적폐청산 차원에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 내부에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민변이 주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파다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몸담았던 민변은 현 정권 들어 소위 ‘성골’로 불리며 인재풀로 급부상한 곳이다. 민변 출신 변호사들은 정부 요직을 비롯해 법조계 정치권 등에 포진해 있다. 정치권에선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 박범계 전해철 박주민 민주당 의원 등이 민변 출신이다. 정부에선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김외숙 법제처장 등이 유명하다.
민변 출신들은 사법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법원장 직속 ‘사법발전위원회 건의 실현을 위한 후속추진단(이하 후속추진단)’ 단장은 민변 출신 김수정 변호사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김갑배 위원장)와 대검 검찰개혁위원회(송두환 위원장)도 민변 변호사들이 이끌고 있다. 민변 출신들은 과거 검사들이 맡았던 법무부 주요 실·국장 자리에도 발탁돼 근무 중이다. 사법부에선 김선수 대법관과 이석태 헌법재판관 등이 민변 출신이다. 둘은 모두 민변 회장을 맡은 경력이 있다.
민변은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정국을 주도하며 사건 초기부터 강한 조치를 요구해왔다. 검찰의 지지부진한 행태를 여러 번 비판하기도 했다. 도마에 오른 법원행정처 폐지 필요성을 부르짖었던 것도 민변이다. 법원행정처의 경우 사법부 내부에선 ‘긍정적인 역할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지까지 할 것 있느냐’라는 여론이 주를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명수 대법원장은 9월 20일 법원행정처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 조국 민정수석도 10월 7일 페이스북에 “법원행정처 폐지는 시대적 과제”라고 지원사격 했다.
특히 민변은 과거사 문제에 남다른 목소리를 내왔다.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다시 조사하기로 결정한 김학의 전 차관 성접대 논란,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PD수첩 사건, 유우성 씨 간첩조작 의혹, 장자연 고위층 성접대 사건 등은 민변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던 사안들이다. 민변은 자체적으로도 과거사위원회를 꾸린 상태다. 그 중에서도 양승태 대법원 시절 주요 판결은 전부 재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민변 출신 한 변호사는 “재판을 놓고 거래를 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경악스러운 일이다. 바닥으로 떨어진 사법부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과거 판결을 제대로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김명수 대법원의 적폐청산 행보와도 맞닿아 있다. 사법부 내에선 수백 건의 판결이 검토 대상에 올랐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2013년 9월 이른바 ‘키코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그 중 하나인 것으로 전해진다. 100여 개 중소기업들이 키코 계약(기업과 은행이 환율 상하단을 정해 놓고 그 범위 내에서 지정 환율로 외화를 거래하는 상품)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대법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이 발표한 재판 거래 의혹에도 포함된 내용이다. 민변은 “재판부가 은행에 유리한 판단을 하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강제징용 판결,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판결,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살생부’에 오른 판사들은 뒤숭숭한 모습이다. 한 부장판사는 “이런 식으로 하면 누가 소신 있게 판결을 내리겠느냐”라고 반문한 뒤 “아마 대부분의 판사가 다시 사건을 맡아도 똑같은 판결을 내릴 것이다. 권력의 눈치를 봤던 일부 판사는 비판을 받아야겠지만 이 때문에 과거 판결에까지 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사법부 스스로의 권위를 무너트리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판사 역시 “과거사 정리라는 명분을 앞세워 결국 판사 줄 세우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이번 정권 들어 특정 정치 성향 판사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들의 편향된 잣대로 사건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동시에 민변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도 감지된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민변은 더 이상 과거의 시민단체가 아니다. 이제 변호사들이 서로 민변에 가입하려고 한다. 권력집단이 됐다. 그들이 구상한 사법개혁의 밑그림이 현 정권에서 그대로 옮겨지고 있다. 사법부는 그들의 입김에 휘둘려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앞서의 부장판사도 “현 정권 사법 개혁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민변과 그 출신 국회의원들이 분위기를 조성하면 그 뒤를 정부가 따라가는 방식이다. 사법부 적폐청산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누가 주도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면서 “이는 결국 사법부가 정치권에 종속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한 쪽으로 쏠린 추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