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월 31일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사립유치원 비리근절 대안마련 정책 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박용진, 이름 석 자가 2018년 국정감사장을 뒤덮었다. 모두가 알고도 외면했던 교육계의 3대 적폐 중 하나인 유치원 비리를 폭로하면서 아이돌급 스타 의원으로 거듭났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인 박 의원은 10월 11일 국정감사에서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감사로 적발된 전국 1878개의 유치원 비리 5951건을 폭로했다. 10월 29일에는 비리 액수만 총 316억 618만 원에 달하는 2325개 유치원의 6908건 비리를 공개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박 의원은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정의를 외쳤다”며 “우리 정치의 희망을 발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교육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은 천태만상이었다. 국가 예산을 외제차 리스 비용으로 사용한 유치원 원장과 설립자는 부지기수였다. 단란주점 비용을 쓴 이들도 있었다. 출퇴근 차량 보험료, 자동차세, 주유비, 수리비 등에 쓴 이들은 애교에 속했다. 파장은 일파만파였다. 전국에 숨죽이던 ‘앵그리 맘’(성난 엄마)이 횃불을 들고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로 달려들었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10월 17일 전국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다음 날 공개한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에 따르면 응답자는 88.2%는 “비리 사립유치원 명단 공개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국민 10명 중 9명가량이 찬성한 것이다. 진보와 보수, 2040과 5060세대, 영·호남 가릴 것 없이 찬성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대 의견은 7.8%에 불과했다. 모름은 4.0%였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정·청은 성난 민심에 화들짝 놀랐다. 박 의원 폭로 후 수시로 대책 회의를 열었다. 오는 2020년까지 국가회계시스템 ‘에듀파인’을 사립유치원에 확대 적용키로 했다. 또한 2021년까지 국공립유치원 취원율 40%를 조기 달성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이른바 ‘박용진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을 당론 발의키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섰다. 문 대통령은 10월 29일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유치원 폐원으로 아이들이 피해를 볼 때는 단호히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앞서 이낙연 국무총리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도 “사립유치원 비리를 국민께 모조리 알려야 한다”, “유아교육의 공공성 바로 세우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유치원 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여당 초선의 용기가 불러온 나비 효과다. 박 의원은 사립유치원 비리 폭로 과정에서 “저보고 벌집을 건드렸다고 하는데, 한유총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갈 생각”이라면서도 “두렵고 무서웠다”고 고백했다. 한때 동지였던 고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 얘기도 꺼냈다. 박 의원은 “떡값 검사 이름을 공개했다가 결국 본인만 의원직을 잃었다”고 말했다. 노 전 의원은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돈을 수수한 검사 명단 자료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했다가, 2013년 대법원으로부터 유죄를 선고받고 한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박 의원은 사립유치원 비리 폭로 이후 20여일 만인 10월 30일 올해 후원금 모금을 마쳤지만, 혹시 자신도 ‘노회찬의 길’을 걷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그만큼 박 의원은 민주당의 비주류 중 비주류다. 뿌리는 ‘아웃사이더’다. 고운(고등학생 운동권) 출신인 박 의원은 성균관대(90학번) 총학생회장 시절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회(한총련) 내 민중민주파(PD)에서 활동했다. PD는 한총련 내에서도 소수파다. 눈칫밥을 먹는 데 이골이 날 정도로 비주류를 전전한 셈이다.
반면 민주당 내 운동권 그룹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민족자주파(NL)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아이돌 스타급인 박 의원이 민주당 내에서도 비주류인 이유다. 첫 출발부터 민주당 주류와는 결이 달랐다. 그는 1992년 대선 때 ‘민중 후보’였던 백기완 선거운동을 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2001년 민주노동당 강북을 지구당위원장을 시작으로, 2004년 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박 의원이 꿈인 ‘진짜 진보의 집권’은 쉽지 않았다. 2007년 민주노동당은 NL과 PD의 극한 갈등으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PD인 그는 ‘노회찬·심상정’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꾸렸다. 박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 때 진보신당 배지로 서울 강북을에 나섰지만. 11.7%로 낙선했다. 당시 진보신당이 비례대표 의석수 배분 마지노선인 정당득표율 3%에 0.06%포인트 모자란 2.94%(50만3601표)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선전했다. 박 의원은 앞서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13.3%를 득표했다.
2010년 ‘박용진의 시대’가 열렸다. 박 의원이 진보신당 부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당시 민주노동당에선 이정희 체제가 개막했다. 진보진영에선 “NL계의 차세대 진보 아이콘이 이정희라면, PD계에는 박용진이 있다”는 말이 나왔다. 진보신당 내부에서도 기대감이 컸다. 정의당 한 당직자는 “박 의원의 강점은 콘텐츠와 추진력”이라며 “머리도 상당히 비상해 노·심(노회찬·심상정)을 잇는 주자로 키우려는 분위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결별의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박 의원은 19대 총선을 1년 앞둔 2011년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며 돌연 진보신당을 탈당했다. 2008년 18대 총선과 2010년 6·2 지방선거 패배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8대 총선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한 진보신당은 6·2 지방선거 때 당 간판인 노·심을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로 각각 내세웠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야권단일화를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고수한 노 전 의원은 3% 득표율에 그치면서 야권 패배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심 의원은 국민참여당 경기지사 후보로 나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후보직을 양보, 당원의 극한 반발에 시달렸다. 야권대통합을 주장한 박 의원의 선택도 진보진영의 한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시 진보진영은 NL계인 민주노동당과 PD계인 진보신당, 친노(친노무현)계인 국민참여당의 ‘진보 3자 통합’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특히 진보신당 내부 갈등은 극에 달했다. 그 와중에 당의 부대표가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며 탈당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당시 대표는 노회찬 전 의원이었다. 구진보신당 관계자는 “(박 의원 탈당 당시) 전화로 ‘연을 끊자’고 할 정도로 분노감이 찾아왔었다”며 “지금 돌이켜보면 박용진을 놓친 우리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의원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박 의원은 2012년 총선 때 서울 강북을에 공천을 신청했다. 당시 박 의원은 “민주통합당이 박용진을 선택해야만, ‘도로 민주당’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과는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출신인 유대운 전 의원의 승리. 당시 민주통합당 내부에선 “진보정당 출신인 ‘박용진의 성장’이 부담스럽다”는 말이 파다했다. 진보진영 인사들은 박 의원을 향해 “노·이·사(친노·이대·486) 공천의 희생양이 되려고 탈당했느냐”며 비난의 화살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박용진의 꿈은 4년 뒤로 미뤄졌다. 절치부심한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51.1%의 득표율로 강북을에 깃발을 꽂았다. 2000년 총선 이후 16년 만이다. 하지만 비주류의 꼬리표는 계속 따라다녔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비서실장직은 친문(친문재인)계 지지층에게 눈엣가시였다.
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문 대통령에게 유리한 개헌 전략보고서를 쓴 것을 비판하자, 역시 “김종인계”라는 비아냥이 따라다녔다. 20대 전반기 국회 때 정무위원회에서 재벌 개혁수로 맹위를 떨친 박 의원은 은산분리 완화에 반대를 천명한 이후 국회 교육위원회로 좌천당했다. 박 의원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로 가라고 했다가 결과 발표 1시간 전에 교육위행을 통보받았다”고 말했다. 여권 주류에서도 박 의원의 개혁성 등을 높이 평가하지만,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동질감은 적다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