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한국랭킹 1위는 박정환, 중국랭킹 1위는 커제, 일본 일인자 하면 이야마 유타였다. 그런데 11월 들어 한국과 중국 모두 랭킹 1위가 교체되었고, 일본도 굳건했던 일인자 위상에 균열이 생겼다. 반란의 주역은 신진서, 미위팅 그리고 과거의 명인, 장쉬다.
신진서 9단
2018년 11월, 59개월 동안 1위 자리를 지켰던 박정환은 2위로 물러나고 ‘추격자’ 신진서가 새로 1위 바통을 이어받았다. 신진서는 2000년 3월생이다. 박정환이 세운 19세 5개월 기록(2012년 6월)을 깨고 18세 8개월로 최연소 1위 기록도 경신했다. 2003년 랭킹 제도 도입 후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정환, 신진서까지 다섯 명이 한국랭킹 1위 자리에 앉았다.
신진서가 랭킹 1위에 오른 건 인공지능 대중화의 힘이 크다. 평소 기자들에게도 “이 시대 프로기사라면 인공지능은 필수다. 복기와 더불어 초반 포석에서 승률 가중치나 돌의 배치에 따른 정석변화를 주로 살핀다”라고 말해왔다. 흡수력이 남다른 젊은 나이에 인공지능에 느끼는 초일류기사의 감성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다. 신진서는 페이스북이 내놓은 바둑프로그램 ‘엘프고’를 애용하며 아이패드와 컴퓨터를 원격 연결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공지능의 수를 연구한다.
신진서는 지난 2012년 7월에 입단했다. 당시 입단 인터뷰에서 신진서는 “1위 박정환과 정상을 다투고 싶다. 얼마나 잘 두는지 알고 싶다”는 말을 남겼었다. 올해 12월에 열리는 천부배 결승 3번기에서 이 둘이 만나 ‘한국랭킹의 공정성’을 시험해 주길 간절하게 바란다(박정환과 신진서는 둘 다 천부배 4강에 올라있다. 12월 21일 박정환-천야오예, 신진서-장웨이제가 준결승을 치르고 12월 23일부터 결승 3번기를 벌인다).
미위팅 9단
2015년 10월부터 3년 넘게 중국랭킹 정상을 지킨 커제는 미위팅에게 밀려났다. 지난 10월까지 커제와 미위팅이 공동 1위였지만, 11월 발표한 새 랭킹에선 15점 차이로 미위팅 단독 1위다.
활달한 성격인 커제는 방송과 각종 이벤트에 참가하며 유명세를 즐긴다. 2위로 밀려난 이유가 바둑 외적인 활동이 잦아 슬럼프가 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불과 보름 전 인터뷰에서 목진석 국가대표팀 코치는 “커제는 변함없는 강자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일인자다. 한국기사들의 목표는 여전히 커제다”라고 말했었다. 커제가 미끄러진 건 미위팅이 더 강해진 결과다.
미위팅은 96년 1월생으로 커제(97년 8월생)보다 형이다. 11세에 입단했고, 꾸준히 성적을 내다가 2013년말 제1회 몽백합배 결승에서 구리를 3-1로 꺾고 우승해 9단으로 특별승단했다. 현재 명인과 창기배를 포함해 중국 내 기전 4관왕에 올라있다.
기풍은 상당히 독특하다. 지난 2017년 딥젠고를 테스트하기 위해 열린 제1회 월드바둑챔피언십에서 개발자 가토 히데키는 “미위팅의 수들은 대부분 딥젠고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컴퓨터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읽기를 구사한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중국 국내기전을 점령하며 1위에 오른 미위팅이 한국기사에게도 달라진 면모를 보일 수 있을까? 삼성화재배, LG배, 농심신라면배 등 올해 진행 중인 세계대회 본선에선 그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기만성형 승부사, 미위팅이 활약하는 세계무대는 내년에나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장쉬 9단
일본 일인자는 여전히 이야마 유타다. 기성, 명인, 본인방 외에도 왕좌, 천원, 십단까지 6개 타이틀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 열린 제43기 명인전 도전 7번기 최종국에서 장쉬에게 패해 그 중 하나인 명인타이틀을 빼앗겼다. 일본 명인전은 아사히 신문사가 주최하는 일본 상금랭킹 2위 기전으로, 우승상금은 3100만 엔(약 3억 700만 원)이다.
명인전 7번 승부 도전기 1국은 올해 8월 28일 시작했고 10월 10일 열린 4국까지 이야마 유타가 3승 1패로 앞섰다. 1패하면 승부가 결정 나는 벼랑 끝 대국에서 장쉬는 세 판을 연달아 이겨 대역전 스토리를 완성했다. 38세 노장의 투혼이었다. 장쉬보다 9살 어린 이야마 유타에게는 뼈아픈 패배였다.
사실 장쉬는 이야마 유타가 일본 일인자가 되기 전 열도의 바둑지배자였다. 명인전에선 29기, 30기, 32기, 33기 때도 우승했다. 2009년 이야마 유타가 최연소 명인(20세 4개월) 기록을 세울 때 상대가 장쉬였다.
징조는 있었다. 시간을 되돌려 올해 2월, LG배 결승전이 치러진 일본 도쿄 일본기원. 이야마 유타와 중국 셰얼하오가 대결한 결승 1국 해설자 장쉬는 “내가 2005년 LG배에서 우승했을 땐, ‘수년 내에 또 타이틀을 따겠지’하고 쉽게 생각했다. 그 후 너무 빨리 이야마 유타에게 일인자 자리를 넘겨줬다. 최근 세계대회 부진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라며 농담인 듯 아닌 듯 묘한 논평을 남겼었다.
세월을 거스른 장쉬의 일격은 일본 일인자 이야마 유타 가슴을 할퀴었다. 아직도 5관왕으로 ‘배부른 사자’ 이야마 유타에게는 긍정적인 상처다. 새 명인 장쉬가 세계무대에서도 투혼을 보여주길 바란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