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의 저자 배은정 씨를 만났다. 최준필 기자
지난 6월, ‘배리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유튜버 배은정 씨(여·22)가 탈 코르셋 운동(여성에게 강요된 미적 기준인 ‘코르셋’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올린 영상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의 내용이다. 지금까지 무려 539만여 회가 조회된 이 영상을 통해 그는 14만여 명의 구독자를 끌어모았고, 지난달에는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책까지 출간했다. 유튜브를 통해 화장법을 소개하던 뷰티 유튜버는 어떻게 세상을 향해 탈 코르셋을 외치게 된 걸까. 11월 6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배은정 씨를 만났다.
지난해 8월 첫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 전까지 배 씨의 삶은 집이라는 폐곡선에 갇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자살해’라는 말을 들은 이후 그에겐 늘 외모로 인한 따돌림과 폭언이 뒤따랐다. 성인이 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반바지를 입은 그에게 모르는 이가 다가와 ‘눈 썩을 거 같으니 반바지 입지 말라’고 했고,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그에게 50대 남성은 ‘뚱뚱한데 집에나 있지 왜 이런 데를 오냐’고 모욕했다. 활발했던 성격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갔고,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그에게 메이크업과 유튜브는 좋은 벗이었다.
“원래도 통통했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골반 종양 수술을 하고 수년간 통원 치료를 받으며 살이 정말 많이 쪘다. 왕따를 당했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면서도 남의 눈치를 볼 정도로 점점 소극적으로 변했다. 그렇게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유튜브 영상을 많이 보게 됐는데 특히 뷰티 유튜버들이 화장을 통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자격증을 준비할 만큼 화장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볼텐데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됐다”
탈 코르셋을 선언하기 전부터 배 씨에게 악성 댓글은 ‘기본값’이었다. 그의 메이크업 튜토리얼 영상에는 외모에 대한 조롱이 쏟아졌고 일부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인신공격과 함께 캡처 사진이 떠돌았다. 그러던 지난 6월 배 씨는 돌연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뷰티 유튜버였던 그녀는 어쩌다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탈 코르셋 영상을 올리게 되었을까.
“오랜만에 친한 언니를 만났는데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고 온 거다. 원래 나처럼 화장에 관심이 많고 머리도 아주 길었던 언니였다. 언니는 탈코르셋을 실천 중이라고 했다. 사실 당시에는 탈 코르셋이 뭔지도 잘 몰랐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혼자 고민하면서 사회에서 강요하는 여성성 때문에 너무 많은 여성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또 내 영상에 어린 친구들이 ‘외모 때문에 놀림 받았는데 언니보고 꾸미고 싶어졌어요’라는 식의 댓글을 썼던 것이 생각나 ‘꾸미지 않아도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 영상을 올린 이후 많은 이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에겐 이전보다 더 많은 악성 댓글이 쏟아졌다. 실제로 ‘찾아가 죽이겠다’는 메일을 받기도 했다. 한동안 외출을 할 때면 부모님을 동반했다.
“다시 태어나도 유튜브를 할 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반반이다. 지금은 이미 시작했으니 책임지고 앞으로 더 나아가겠다는 생각이지만 그 수많은 악플을 다시 견딜 자신이 있을까 싶다. 실제로 악플 때문에 유튜브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엔 책이 나오면 또다시 먹잇감이 될 거란 생각에 너무 두려웠지만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데 숨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6월 업로드 돼 큰 화제가 된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 영상. 사진=유튜브 캡처
그렇다면 배 씨는 탈코르셋을 어떻게 정의할까. 또 뷰티 유튜버가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에 대해 어떤 생각일까.
“여성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탈코르셋은 ‘여성을 억압했던 사회적 여성성에서 탈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도 털이 많을 수도 있고, 패션에 관심이 없을 수 있고, 머리가 짧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탈코르셋을 선언한 이상 뷰티 영상을 올리는 건 모순이다. 화장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지만, 그것을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꾸며져 있는 여성들이 미디어에 많이 보일수록 여성 역시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퍼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일상, 반려묘, 토크 영상이 주로 올라갈 거 같다”
탈코르셋을 선언한 배 씨의 삶은 달라졌지만 한편으론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꿈을 쫓는 20대지만 삶의 무게는 가벼워졌다고 고백한다.
“일단 외출 준비시간이 2시간에서 30분으로 줄었고 화장이 번질까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도 없어서 너무 편하다. 예전에는 음식을 먹는 나 자신이 싫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 자신을 아끼다 보니 마지못해 하던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요즘에는 요가, 필라테스, 조깅을 하고 있는데 복싱과 주짓수도 도전해보고 싶다”
배 씨의 꿈은 배우다. 지금은 해외 유학을 통해 연극영화과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19살 때 한참 배우 오디션을 많이 봤고, 한 단편 웹드라마에는 최종 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연기력은 괜찮지만 살을 빼고 성형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는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으면 (연기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 앞으로 점점 여성 서사의 영화들이 많아 졌으면 한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