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일이 생각난 것은 21세기 대한민국 초등학교에서 나왔다는 시험문제 때문이었다. ‘저녁 준비, 장보기, 빨래하기, 청소하기’를 나열해놓고, 그 일을 주로 누가 하는 일인지를 묻는 물음이었다. 1.삼촌 2.어머니 3.나 4.동생 5.할아버지
생각해보니 그래도 생각해서 낸 문제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의 시험지라고 하니 ‘나’나 ‘동생’이 답일 리는 없겠다. ‘할아버지’나 ‘삼촌’과 함께 사는 아이들이 많지 않은 현실이고 보면 그들도 답에서는 빠져야 한다. 당연히 답은 하나 남은 ‘어머니’다.
문제를 낸 선생님은 보기에 ‘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도우미’를 넣지 않음으로써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것이었다. 논란의 여지를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문제가 성차별 논란을 낳고 있다. 아니, 분명한 성차별이다. 왜 그 일들은 주로 엄마가 하는 일이라고 함으로써 그 일들은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편견을 심을까.
저녁 준비, 장보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그 일들이 허드렛일이라거나 열등한 일이란 뜻이 아니다.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사는데, 어떻게 저녁을 준비하고, 장을 보고, 빨래를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정돈된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은데 어떻게 청소하는 일이 열등한 일일 수 있을까.
나는 무엇보다도 청소하는 일을 좋아한다. 청소를 하다 보면 무거웠던 마음도 가벼워지고, 걸레로 바닥을 반짝반짝 닦다보면 마음도 그만큼 깨끗해진다. 원고를 끝낸 날이거나 말을 많이 한 날, 혹은 외부강연을 하고 온 다음 날 아침이면 이상하게 나는 청소가 하고 싶다. 청소하는 느낌이 좋아서 나는 집안청소는 좀처럼 남을 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은 주로 누가 하는 일인지를 묻는 것은 이상하다. 집안마다 형편이 다를 수 있는 그 일에 정답이 있어야 하고, 그 정답이 ‘엄마’임을 주입한다면, 엄마가 주로는 그 일을 하지 못하는 집의 엄마들이, 아이들이, 가족들이 그 상황을 어떻게 느낄 것인가.
나는 문제의 그 시험지를 찍은 사진에 자연스럽게 찍힌 다음 문제가 좋았다. 직접 해본 적이 있는 집안일을 쓰고, 그 일을 할 때의 생각이나 느낌을 묻는 문제였다. 주관식 같았다. 최근 당신이 자발적으로 직접 해본 집안일은 무엇이었는가. 혹 직접 해본 집안일이 없다면 당신은 그만큼 삶과 멀어진 것인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배우고, 요리를 하면서, 먹고 사는 일, 먹이는 일, 청소하는 일의 힘을 기를 수 있다면 세상사 아무리 힘들어도 중심을 잃지 않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 감사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내 정성이 깃든 음식을 대접하고 대접받다 보면 쉽게 허황되어지지 않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그렇게 작은 사랑들을 나누며 살 수 있어야 삶이 삶다워지리라 믿는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