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 성차별 철폐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4월 24일 서울 중구 을지로 KEB하나은행 앞에서 KEB하나은행과 KB국민은행의 채용과정에서 성차별 점수조작이 벌어졌다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500만 원. 112명의 여성 지원자의 점수를 하향조정해 불합격시킨 KB국민은행 법인에 선고된 벌금이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6장 37조에 따르면 ‘사업주가 근로자의 모집 및 채용에서 남녀를 차별하거나 여성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 직무 수행에 필요하지 않은 신체적 조건, 미혼 조건 등을 제시하거나 요구한 경우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KB국민은행은 2015년 상반기 신입 행원 채용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비율을 6 대 4, 7 대 3으로 해 남성 지원자를 더 많이 합격시켰다. 또 남성 지원자 113명의 서류전형 평가 점수를 임의로 상향조정해 합격시키고, 여성 지원자 112명의 점수를 하향조정해 불합격시켰다. 지난 10월 27일 열린 KB국민은행 채용비리 사건 1심 재판에서는 사건에 연루된 임직원 전원이 집행유예를 받았고, 법인은 양벌규정 최대 수위인 500만 원의 벌금을 내는 데 그쳤다.
은행권 채용비리 사건의 첫 판결이 예상보다 가볍게(?) 나오면서 앞으로 재판이 예정된 다른 은행들은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차별 행위가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처벌 수위가 낮았다”며 “다른 은행의 경우 더욱 낮은 수위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채용비리와 관련해 재판이 예정된 은행은 하나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 등이다. 특히 신한·하나은행은 채용 과정에서 성비를 조정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그러나 은행권에서는 “경제적 이득을 취득했다고 볼 만한 사정이 없다”는 KB국민은행 판결의 양형 이유를 들어 이들 은행이 채용 성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13년 하나은행 채용비리 검사 잠정 결과’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최종 임원면접에서 합격권 내 여성 2명을 탈락시키고 합격권 밖의 남성 2명의 순위를 상향조정해 합격시켰다. 하나은행은 또 동일한 직무임에도 남녀 차등 채용을 계획적으로 추진했다. 하나은행은 2013년 하반기 채용 당시 사전에 남녀 비율을 4 대 1로 맞춰놓고 600점 만점인 서류전형에서 여성 합격선을 467점, 남성 합격선을 419점으로 삼았다. 여성 합격선을 남성보다 48점 높여 잡는 방식으로 차별했던 것이다. 합격선을 남녀 차별 없이 동일하게 적용했을 경우, 남녀 비율은 1 대 1에 근접할 뿐 아니라 여성 합격자가 619명 증가하는 것으로 검사단은 추정했다.
서울동부지방검찰청은 지난 10월 31일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과 신한은행 법인을 업무방해 및 남녀고용평등법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 했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2015년과 2016년 신입행원 채용 과정에서 사전에 남녀 채용 비율을 3 대 1로 정하고, 그에 맞춰 남녀 합격자 수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채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감사 및 수사에 대비, 채용 관련 서류를 폐기하거나 허위자료를 작성해두기도 했다.
은행 관계자 중에서는 시중은행이 채용 과정에서 성비를 조정한 것은 여성 직원의 퇴사나 육아휴직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여성 직원의 비율이 현저히 높은 직무의 경우 여성 직원이 결혼 후 퇴사하는 경우가 많아 인력이 적어지는 것은 물론 업무 연결성이 떨어진다”며 “은행 입장에서는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을 고려해 업무 연결이 끊기지 않는 남성 직원의 비율을 높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억지 주장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한 시중은행 노조 관계자는 “여성 직원의 비율이 많은 부문은 주로 수신계인데 퇴사로 인한 인력 부족 문제가 우려된다면 이전부터 은행 내부에서 정책이나 전략상 해당 부문의 남성 직원을 늘리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며 “직무 특성상 특정 성별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채용 과정에서 차별하고, 이후 처벌을 피하고자 억지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8월 은행업감독업무시행세칙의 경영공시 서식을 개정했다. 이는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여성태스크포스(TF)가 지난 7월 발표한 ‘채용 성차별 해소 방안’에 따른 것이다. 세칙 개정을 통해 은행들은 3분기 경영공시부터 신규 채용자 성비를 반영하고, 직원 현황에도 남녀 비율을 공시해야 한다. 은행권은 채용 일정을 고려하면 공채가 완료되는 4분기 경영공시부터 이 같은 내용이 반영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형사처벌 원천봉쇄? 채용서류마저 폐기…대기업 금융계열사 ‘꼼수’ 논란 대기업 금융 계열사들도 성차별 채용 의혹이 제기된다. 더욱이 이들 대기업 금융계열사들은 채용서류마저 폐기한 의혹을 사고 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삼성그룹 금융계열사 4곳과 한화그룹 계열사 2곳이 형사처벌을 면하기 위해 고의로 채용서류를 폐기했다”고 주장했다. 현행 남녀고용평등법 제33조에 따르면 사업주는 이 법의 규정에 따른 사항에 관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서류를 3년간 보존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삼성생명보험과 삼성화재해상보험, 삼성카드, 삼성증권, 한화생명보험, 한화손해보험 총 6곳은 채용서류를 보존하지 않아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고용노동부는 사전실태조사를 통해 이들 기업을 성차별 의심 사업장으로 분류, 근로감독에 나섰으나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진위를 판단할 수 없었다. 설 의원은 “사업주가 성차별 채용 조사를 받지 않기 위해 채용서류를 무단 폐기한 행위는 증거 인멸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채용서류 미보존의 경우 과태료 처분에 그치지만, 부당 채용 사실이 드러날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용서류 보존에 대해서는 두 개 법이 상충하는 것처럼 비친다.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채용 관련 서류를 3년 보존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지만,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채용서류 반환 청구 기간 180일이 지난 경우 구인자는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라 채용서류를 파기해야 한다. 삼성생명과 한화생명 등도 노동부 조사 과정에서 “채용절차법에 근거한 내부지침에 따라 채용 관련 서류를 폐기해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대해 ‘형사처벌 회피용’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채용절차법에 따라 폐기해야 하는 서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등 구직자가 작성한 서류일 뿐,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정한 보존 대상 서류는 채점표 등 회사가 작성한 채용서류라는 것. 채용성차별철폐공동행동 관계자는 “지원자가 쓴 개인정보 서류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폐기해야 하지만, 기업이 채용 과정에서 작성한 평가점수 등의 자료는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