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박은숙 기자
한 친문 의원에게 얼마 전부터 여의도를 중심으로 은밀히 돌고 있다는 ‘친문 리스트’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일단 만나자”고 했다.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A4 용지 세 장을 꺼내며 “아마 이게 유출돼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소문으로만 접했던 명단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나를 비롯해 몇몇 의원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중”이라면서 “최종 완성본이 조만간 나올 것”이라고 했다.
A4 용지엔 친문 핵심으로 꼽히는 여권 인사 40여 명의 실명과 직책, 그리고 주요 경력 등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대부분 민주당 의원들이었고, 나머진 청와대와 정부 등에 몸담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운동권 출신의 청와대 비서관들 이름도 있었다. 일부 인사들 옆엔 메모가 쓰여 있기도 했는데, ‘공천’ ‘후보’ 등과 같은 단어들이 눈길을 끌었다. 2020년 총선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었지만 그 친문 의원은 “너무 앞선 얘기다. 일반적인 평가 등을 기록해 둔 것”이라고 부인했다.
“누가 봐도 다 친문인데 따로 정리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묻자 그는 웃으면서 “지금 친문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느냐. 여권은 다 친문이다. 그래서 더 이러한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답했다. 진짜 친문이 누구인지, 옥석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로 읽혔지만 그는 “확대해석이다. 그냥 친한 의원 여럿이서 만든 참고용일 뿐”이라고 손을 저었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의원을 포함한 몇몇 친문 핵심 인사들이 리스트 작성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내용을 접한 정치권 관계자들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들은 여권 주류인 친문 내에 모종의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한 평론가는 “집권 중반기 흔히 나타나는 여권 권력 싸움의 징조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정권 초엔 잘 보이지 않던 주류 세력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친문으로서도 이제 슬슬 다음 총선과 대선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라면서 “여권 내에 피아를 가려내겠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사실 정권 초만 하더라도 민주당에서 계파 구분은 무의미했다. 정권 교체를 이끌어낸 친문계는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힘입어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 친문을 자처하는 비문 의원들도 적지 않았다. ‘너도 나도’ 친문을 외쳤다. 친문계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지난 6월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 과정에서 정점을 찍었다.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친문’ 타이틀의 위력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8월 전당대회 전후로 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친문계 분화가 시작됐고, 당 일각에선 청와대 일방독주 국정운영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친문 핵심 인사들로 꾸려진 ‘부엉이 모임’이 도마에 올랐다. 안팎에서 비난이 거세게 일자 이 모임은 결국 해체를 선언했다. 청와대 2인자로 통하는 임종석 비서실장에 대한 견제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이 무렵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문 대통령 지지율이 빠지기 시작한 것과 관련 지어 바라보기도 했다.
전당대회가 이해찬 대표 승리로 끝나자 친문 핵심부 인사들은 복잡한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이들이 김진표 의원을 밀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다. 문 대통령이 ‘정치인 이해찬’을 껄끄러워 한다는 얘기도 친문 내부에서 흘러 나왔다. 한 친문 의원실 관계자는 “우리가 김진표 의원을 밀었다는 것은 곧 청와대 뜻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청와대 ‘오더’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권 초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했다.
일찌감치 다음 총선과 차기 대권 등을 준비하고 있던 친문 내부에선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또 다른 친문 의원은 “수가 늘어나다보니 일사불란한 느낌은 없어진 게 사실이다. 일단 ‘아군’이 누구인지부터 선별해내는 게 필요했다. 정권 중·후반기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대통령을 확실히 엄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면 ‘친문 리스트’ 작성의 이유가 쉽게 이해가 간다.
정치권이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이러한 친문 진영 움직임이 차기 총선과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다. 그중에서도 ‘친문 리스트’가 공천 명단일 수 있다는 의혹이 핵심이다. 실제 리스트를 살펴본 결과 총선 출마가 확실시되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앞서 친문 의원 말처럼 ‘너무 앞서 나간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벌써부터 이런 명단들이 돌아다니면 향후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장면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박근혜 정부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진실한 사람’을 뽑아달라고 호소했다. 그 이후 친박에선 ‘진박 감별’이 시작됐고, 이는 결국 박 전 대통령의 입지 약화로 이어졌다. 친박 패권주의에 내몰린 결과였다. 그나마 진박으로 꼽혔던 의원들조차 박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등을 돌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친박이 아니다’라고 한 의원들도 있었다.
한 비문 의원실 관계자는 “2016년 총선 상황과 흡사하다. 신문 기사에서 친박 자리에 그대로 친문을 넣어도 그리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친문 패권주의가 만연해 있다. 그들은 장벽을 치고 성골 진골 타령만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 비문 의원 역시 “나도 한때 친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외감은 계속됐다. 좀처럼 섞이기 힘들다. 낙하산 인사가 문제라고 하는데 그것 역시 그들의 영역”이라고 하소연했다.
친문 리스트에 대해서도 청와대와의 교감 없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낮다는 견해가 주를 이뤘다. 3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말 한마디로 시작된 진박 감별 논란의 ‘데자뷔’라는 얘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앞서의 비문 의원은 “이 정도 되는 명단을 의원 몇 명이 단순 참고용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의원들 편가르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박근혜 정부 때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