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KBO 총재.
구본능 총재가 물러나고 정운찬 총재가 KBO 새로운 수장을 맡는다고 알려졌을 때 대부분의 야구인들은 크게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 총재는 소문난 야구광이었다. 그중 두산 베어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일간지에 ‘정운찬의 가을야구 엿보기’라는 칼럼을 게재한 적도 있었고 ‘야구예찬-야구바보 정운찬의 야생야사 이야기’라는 책도 펴냈을 정도다.
야구계에서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총장,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인물이 KBO 총재로 추대된 사실을 기대 반, 걱정 반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기대를 했던 건 새로운 인물을 통한 KBO 조직의 과감한 변화와 개혁이었고 걱정은 그런 변화와 개혁이 새로운 인물을 통해 이뤄질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정 총재는 KBO 총재 취임사에서 ‘클린 베이스볼’을 내세우며 전면에 나섰다. 취임 초반에는 클린 베이스볼이 제대로 이행되는 듯했다. KBO가 2009년 이후 9년 만에 외부감사를 받았고 조직 유연성을 강화하고 구매 계약 자금 운용과 관련한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인 직무 순환을 약속하며 조직 개편을 단행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 시즌 KBO리그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의 연속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넥센 히어로즈가 지난해 실시한 두 건의 트레이드에 현금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당시 트레이드 상대 구단들이 이 같은 사실을 인정했던 일이었다. 프로야구판을 뒤흔들 정도의 대형 스캔들이 터졌지만 KBO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며 해당 구단들에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사태의 핵심인 히어로즈한테 5000만 원, 히어로즈와 거래했던 상대 구단들한테는 각각 2000만 원의 제재금을 부과했고, 사기와 배임,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상태인 이장석 전 히어로즈 대표는 무기실격 처리했다. 여론은 KBO의 처벌이 생색내기에 불과하고 결국에는 KBO도 한통속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익명을 요구한 해설위원 A 씨는 “KBO가 일부 구단한테 벌금을 부과하는 걸로 현금 트레이드 건을 그냥 정리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장석 전 대표를 무기실격 처리했지만 이미 법정구속 상태인 터라 그 제재가 이 전 대표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정운찬 총재의 강력한 리더십을 기대했던 사람으로서 그 일처리는 상당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A 씨는 또한 “히어로즈 뒷돈 게이트는 SK를 제외한 8개 구단이 히어로즈와 트레이드 시 현금을 주고 신고하지 않았거나 금액을 축소 발표한 것을 확인했고 지난 10년 동안 히어로즈가 주도한 트레이드에서 현금 131억 5000만 원이 신고되지 않았던 검은 거래가 사실로 드러난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클린베이스볼을 기치로 그릇된 관행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정 총재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아무리 상벌위원회의 결정이었다고 해도 정 총재의 의지가 있었다면 충분히 재고해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정운찬 KBO 총재가 10월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지난 10월 23일 정운찬 총재가 국정감사 증인으로 참석했었다. 이미 선동열 대표팀 감독이 국정감사 증인으로 나갔던 터라 정 총재의 출현은 야구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정 총재가 정치인들의 질문과 추궁에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은 이전 선 감독의 국감 때 받은 역풍을 의식해서인지 정 총재한테는 예의를 갖춰 질문했다.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던 중 손 의원은 정 총재에게 “전임감독제와 대회별 감독제 가운데 어느 쪽이 낫냐”고 물었다. 정 총재는 “개인적으로 전임감독제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상비군이 없다면 (전임 감독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손 의원은 “선동열 감독이 TV로 선수들을 본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질문을 건넸다. 정 총재는 “선동열 감독의 불찰이었다고 생각한다. 야구장에 가지 않고 집에서 보는 것은 경제학자가 시장에 가지 않고, 지표 갖고 정책을 대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정 총재의 이러한 발언은 야구인들로부터 엄청난 공분을 샀다. 실제로 수도권 팀의 한 코치는 기자에게 전화해선 “정 총재가 KBO 수장이 맞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KBO 수장이면 야구인들 입장에서 대변을 해야지 마치 제3자마냥 이미 시행 중인 대표팀 전임감독 제도와 선동열 감독의 일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 있느냐”고 격분했다. 그 코치는 정 총재의 국정감사 발언으로 인해 대부분의 야구인들이 정 총재한테 등을 돌리게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국정감사에서 보인 정 총재의 돌출 발언을 놓고 기자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정 총재의 발언을 KBO 내부에서 미리 준비해준 내용인지 아니면 정 총재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발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취재한 바에 의하면 둘 다 맞았다. KBO에서도 국정감사에 임하는 정 총재를 위해 예상 질문지와 답변을 만들었다는 후문이고 정 총재는 정 총재대로 야구 관계자들과 만남을 갖고 자신이 국정감사에서 어떤 태도로 답변을 해야 할지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과는 헛수고로 끝났다. 정 총재가 국정감사에서 주위의 조언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바람에 야구팬들뿐만 아니라 야구인들한테까지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특히 야구 대표팀 문제는 가장 예민하고 인화성이 강한 사안이라 KBO 총재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다 더 신중한 언행을 보였어야 한다는 게 야구인들의 이구동성이었다.
11월 6일, 넥센 타이어와 계약 만료를 앞둔 서울 히어로즈는 키움증권과 새로운 메인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매년 100억 원의 지원과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KBO 장윤호 사무총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불편한 심기를 노출했다. 히어로즈 구단의 메인 스폰서십 발표가 리그 최고 축제인 한국시리즈 기간에 이뤄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KBO 정운찬 총재가 이장석 전 대표의 영구실격 결정을 한국시리즈 이후로 미룰 만큼 배려했는데 히어로즈가 왜 이렇게 서둘러 메인스폰서 계약을 발표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KBO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야구팬들의 싸늘한 외면을 받았다. 히어로즈의 발표가 한국시리즈 경기가 있는 날이 아닌 이동일에 이뤄졌고, 그동안 각 구단 감독, 선수 은퇴 등 굵직한 뉴스들이 포스트시즌에 발표됐던 걸 감안했을 때 KBO의 발끈한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KBO 조직을 잘 알고 있는 야구인 B 씨는 “정운찬 총재와 장윤호 사무총장의 엇박자가 다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현재 정운찬 총재는 KBO 내부에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걸 장윤호 총장이 총재의 대변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총재의 입지가 더욱 어정쩡해진 상황이다. 총재와 사무총장은 구본능 총재, 양해영 사무총장이 물러나면서 새롭게 선임된 인물들이다. 두 사람에 대한 야구계의 호불호를 떠나 실제 일처리 면에서 보인 두 사람의 호흡은 잘 맞지 않고 있다. 총재의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고, 사무총장의 조언을 총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도 들린다. 한마디로 총재와 사무총장이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소리다. KBO 조직원들 입장에서 두 사람은 외부 인사들이다. 손을 맞잡고 힘을 내도 조직을 제대로 이끌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불협화음을 보인다면 KBO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다.”
B 씨는 또한 “KBO가 건강한 조직이 되려면 총재와 사무총장이 같은 목표를 향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