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은 혼례나 책봉 등 중요한 궁중의식 때 어보와 어책을 만들어 예물로 삼았다. 사진은 정조죽책(위)와 태조옥책.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어보(御寶)는 궁중의식 때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을 위해 제작되는 의례용 도장이다. 또한 어책이란 세자와 세자빈 책봉이나 비와 빈의 직위 하사 때 궁중의식 때 왕이 내리는 특별한 형태의 문서, 즉 교서를 말한다. 어보와 어책을 합해 ‘책보’(冊寶)라고 일컫기도 한다.
가령 왕실의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궁중 의식인 세자 책봉식이 거행된다고 치자. 대궐 정전 앞에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왕은 세자에게 죽책문(임명장)과 교명문(훈계문), 세자를 상징하는 도장을 내려주는데, 이 죽책문과 교명문이 바로 어책이고, 세자의 도장이 바로 어보이다. 특히 세자는 어보과 어책을 받음으로써 왕권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일반적으로 어보는 왕과 왕후의 존호(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칭호)를 올릴 때나 왕비·세자·세자빈을 책봉할 때에 제작되었고, 어책은 세자·세자빈 책봉 때나 비와 빈의 직위를 하사하던 때에 쓰였다.
오랜 기간 해외로 유출됐다가 지난해 환수된 문정왕후 어보.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또한 어책은 재료나 성격에 따라, 오색 비단에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글을 담은 교명, 옥이나 대나무에 책봉하는 글을 새긴 옥책과 죽책, 금동판에 책봉하는 내용을 새긴 금책 등으로 나뉜다. 왕과 왕비가 일생에 걸쳐 받은 어보와 어책, 즉 책보는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돼 보관됐다. 이처럼 책보는 생전에는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고, 사후에도 죽은 자의 권위를 보장하는 신물로 여겨졌다.
조선왕실의 책보는 조선조 건국 초부터 근대까지 57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제작됐는데,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왕실의 책보를 제작해 보관해온 사례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원래 책보는 의례용으로 제작됐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책보에 쓰인 문구의 내용, 작자, 문장의 형식, 글씨체, 재료와 장식물 등이 매우 다양해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의 시대적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책보만이 지닐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책보 중에서도 어책은 역사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사료로서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한 예로 1899년 고종이 정조에게 올린 ‘추상존호’ 옥책은 정조의 숙원을 풀어준 단비 같은 어책이기도 했다. 추상존호란 후대의 왕이 선대의 왕에게 존호를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이 작성한 ‘2013년 어책 조사연구 보고서’에 실린 관련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이 연구는 국립고궁박물관의 과제로 수행됐다.
“정조는 많은 치적을 남긴 국왕이었지만, 생전에 존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평소에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를 국왕으로 복권시킬 때까지 자신은 존호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조의 꿈은 고종에 의해 실현됐다. 1899년 고종은 장조를 국왕으로 추숭해 ‘장종’이란 묘호(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그 공덕을 칭송하여 붙이는 호)가 담긴 옥책을 올렸고, 경모전(선정전)에 있던 장조와 헌경왕후(혜경궁)의 신주를 종묘의 신실로 모시는 부묘례를 거행했다.
고종은 장조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정조와 효의왕후에게 추상존호를 올리는 일도 함께 추진했다. 정조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장종의 부묘례를 거행하던 날 정조에게 ‘경천명도 홍덕현모’라는 추상존호를, 효의왕후에게 ‘장휘’라는 추상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정조를 황제로 추존해 정조에게 선황제라는 제호와 정조(正祖)라는 묘호를 올렸다. 바로 이때부터 조선의 22대 왕을 ‘정조’라 부르게 되었다.”
참고로, 조선의 27왕을 일컫는 태조, 태종, 세종, 선조 등의 이름은 모두 사후에 붙인 묘호이다.
세계기록유산에 공식 등재된 조선왕실의 어보는 331점, 어책은 338점이다. 2018년 1월 프랑스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어책 ‘효명세자빈 책봉죽책’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국내로 환수돼, 현재 어책의 수는 339점이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