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 피해자의 친오빠 하진영 씨를 만났다. 사진=‘그것이알고싶다’ 캡처
‘여대생 청부살인사건’은 영남제분 회장의 부인 윤길자 씨가 판사 사위 김 아무개 씨와 그의 이종사촌 여동생 하지혜 씨를 불륜관계라고 의심하고 친조카를 시켜 하 씨를 공기총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하 씨의 아버지가 백방으로 뛰어 해외로 도주한 청부살인 범인들을 추적하고 법정에 세운 끝에 윤 씨는 2004년 법원으로부터 ‘감형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2013년, 피해자의 유족은 충격적인 제보를 받게 된다.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고 생각한 윤 씨가 신촌 세브란스병원 특실에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SBS ‘그것이알고싶다’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 결과 윤 씨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건강상의 문제로 수 차례의 형 집행정지를 받은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류원기 전 영남제분 회장과 세브란스병원 A 교수는 허위진단서 발급 대가로 1만 달러를 주고받은 혐의를 받았고, 결국 두 사람은 그해 9월 구속기소됐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 중인 한 의사분의 연락으로 윤길자가 그동안 병원 특실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황제 병보석 논란이 누군가의 제보로 알려졌듯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린 영원히 윤 씨가 교도소 밖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거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그 여자는 병원에서 운동도 하고 외출·외박도 자주 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실제 당시 방송에도 (윤 씨가)취재진을 보니 갑자기 손을 떠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온다.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산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가 된 것 같아 너무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2013년 재수감된 윤 씨가 일반 교도소가 아닌 모범수들의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한 ‘화성 직업훈련교도소’에 수감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더는 법무부와 검찰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하진영 씨는 2016년 2월부터 수개월 간 병원, 법원 등에서 1인 시위와 국민감사청구 서명 운동을 펼쳤고, 1만여 명이 넘는 시민의 서명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 씨의 유족은 끝내 윤 씨가 직업훈련교도소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 태광그룹 바로잡기 공동투쟁본부와 금융정의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 민원실 앞에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병보석 취소 의견서를 제출하기 앞서 기자회견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 씨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병원에서 호화입원 생활을 한 윤길자가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모범수만 들어가는 직업훈련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설도 펜션을 연상시키는 최신식 건물이었다”며 “법무부가 왜 이런 조치를 했는지 명확히 밝히려면 이들에 대한 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들에 대한 감사 청구를 했다. 감사원에서도 ‘정말 진중히 검토해 좋은 결과를 알려드리겠다’고 했지만 몇 개월 뒤 ‘법무부 자체에 대한 감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 씨는 지금도 어디선가 윤 씨가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괴로운 마음이 든다고 고백했다. 딸의 죽음 이후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던 하 씨의 어머니는 2016년 2월 자택에서 숨을 거뒀고, 아버지는 강원도에 따로 떨어져 생활 중이다.
“지혜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피해자와 가족들이 원한다면 가해자의 구금에 대한 사실, 형 집행 상황 등을 통보받을 수 있는 ‘범죄피해자에 대한 통지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와 유족이 먼저 정보공개 신청을 해야한다”며 “하지만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니 윤길자가 또 어디에서 멀쩡히 살고 있을까봐 두려워 더는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도 윤길자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 있을지 확신이 안 선다. 다만 주변인으로부터 이종사촌이 부인 류 씨와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지난해 11월 대법원 1부는 류 회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A 교수에게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다. 원심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사이에 허위진단서 발급 대가가 오고 간 사실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류 회장의 업무상횡령·배임죄, A 교수의 허위진단서 발급 혐의 일부가 인정됐다.
특히 1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은 A 교수는 2심 재판부가 ‘형집행정지 결정은 검찰의 몫으로 A 교수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해 벌금형으로 감형되면서 의사면허 취소 위기에서 벗어났다. 취재 결과 그는 현재까지 세브란스병원 암센터에서 정상 근무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하 씨는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윤길자가 죽는 것 단 하나다. 누군가는 더 오래 살아 괴로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지금의 시스템하에서 그들은 결코 괴로운 생활을 하지 않는다”며 “대법원 선고만 2년이 걸렸는데 그런 판결을 받았다. 그렇게 애쓰시던 아버지께서 도리어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하시더라. 우리나라 법 현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년 사건이 부각되고 국민이 함께 분노해 주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하셨다.”고 털어놨다.
사건 이후 형집행정지 법적 기준이 강화되었음에도 잊을만하면 불거지는 ‘황제 보석’ 논란에 하 씨는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털어놨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하지혜 씨의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될 예정으로 현재 시나리오 작업이 어느정도 마무리된 상태다.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한테 (영화화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반성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 할 이유가 없더라. 본래 메가폰을 잡을 예정이었던 이정향 감독님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