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의 대주주인 제네럴모터스(GM)가 지난 10월 19일 산은을 배제한 주주총회에서 연구개발(R&D) 법인 분리를 결정하자 산은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질책이 커지고 있다. 한국 철수를 위한 수순 밟기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산은의 자금 지원이 오히려 철수자금을 보태준 꼴이 됐다는 것이다.
한국GM 2대주주인 산업은행이 GM에 수천억 원을 지원하고도 끌려다니기만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2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업무보고하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산은은 지난 5월 한국GM의 철수를 막는 조건으로 8100억 원을 출자형태로 지원키로 했다. 이 가운데 절반은 이미 지급됐고, 나머지 4050억 원은 올해 말까지가 지급 시한이다. 산은은 세금을 투입해 한국GM을 돕는 대신 향후 10년간 한국을 떠날 수 없도록 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GM은 2023년까지 한국GM의 지분을 매각할 수 없으며, 이후 5년도 35% 이상 1대 주주를 유지해야 한다. GM 역시 출자전환 8억 달러(약 9000억 원)와 회전대출 등 64억 달러(약 6조 8000억 원)를 지원키로 했다.
언뜻 보면 한국GM의 철수를 막는 방안인 것 같지만 막상 돈이 투입된 지금은 오히려 산은을 압박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는 것이 금융권의 평가다.
우선 양해각서에 따르면 GM은 5년 후부터 지분을 매각하기 시작해 10년 후에는 한국에서 철수할 수 있고, 이때 다시 정부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10년 뒤 GM 측이 또 다시 “철수하겠다”며 어떤 요구조건을 들고 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GM으로서는 받을 돈 다 받고 한국에서 제대로 영업을 하지 않아도 10년 뒤 또 거액의 지원을 받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짐을 싸면 그만인 셈이다.
만약 산은이 연말에 약속한 4050억 원을 넣지 않을 경우엔 더 복잡해진다. 약속을 깬 쪽은 산은이기 때문에 GM은 계약을 유지할 의무가 없어진다. 이 경우 이미 받은 4000억 원을 챙기고 한국GM 근로자들에 대한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을 실시하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한국 철수도 이뤄질 수 있다. 게다가 금융권은 자금지원이 철회될 경우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와중에 GM 본사가 글로벌 구조조정을 시작하면서 한국GM 2대주주인 산은에는 관련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메리 바라 GM 회장이 임직원에게 희망퇴직의 내용이 담긴 메일을 보냈지만, 산업은행은 사전에 이를 알지 못했다. 특히 산은의 입장은 GM의 경영적 판단인 희망퇴직 결정에 개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앞으로 한국GM 구조조정 국면이 본격화할 때 ‘산은 패싱’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산은의 입장은 “최고경영자(CEO)가 회사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낸 것을 외부인인 우리가 어떻게 사전에 파악할 수 있겠는가”라며 “희망퇴직은 회사의 경영 사안인데 산은이 미리 파악해야 하는 사안인지도 의문”이라는 것이다.
앞서 바라 회장은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지역에서 12년 이상 근무한 사무직 직원과 글로벌 임원에게 희망퇴직을 받는다고 밝혔다. 만약 희망퇴직 인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정리해고를 실행할지 논의하겠다고 덧붙였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임원의 경우 한국GM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무급 20~30명이 대상”이라면서도 “희망퇴직의 조건이 나빠 실제로 신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지금 당장 한국GM이 희망퇴직을 시행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조만간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금융권은 한국GM의 구조조정과 관련해서는 산업은행과 GM 본사가 일정 부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중은행 한 고위 관계자는 “지분율과 관계없이 2대 주주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면서 “더구나 자금지원까지 받은 GM이 우리 정부나 산은과 아무런 협의 없이 구조조정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 관계자는 “산은이 지금과 같은 자세로 GM에 대응한다면 한국GM 구조조정에서도 ‘패싱’될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경영 정상화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은은 한국GM에 대한 지분이 작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동걸 산은 회장은 지난 8일 산은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17%의 주주(산은)가 83% 주주(GM)의 모든 일에 제동을 걸 순 없다”며 “특정한 것까지 찾아내서 전부 거론할 순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상황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흘러가는 것 자체가 산은의 탓이라고 지적한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미 본사 차원에서 결정되고 실행되는 사안에 대해 이제 와서 산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5월에 이뤄진 협상이 급하게 진행되면서 GM이 빠져나갈 구멍이 뚫렸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결과적으로 떠날 회사에 노잣돈 수천억 원만 얹어준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