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9월 5일 당시 영국 보호령 현 탄자니아의 섬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프레디 머큐리는 1991년 11월 24일 영국 런던에서 에이즈로 사망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덤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침대 위에서 첫사랑이자 오랜 친구였던 메리 오스틴에게 “내 유골이 어디 있는지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뒤 세상을 떠났다.
2012년 동영상으로 소셜 미디어에 올랐던 프레디 머큐리의 묘비.
2012년 10월 5일 영국의 한 켄잘 그린 공원묘지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영상이 소셜 미디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라는 사람의 묘비가 발견된 까닭이었다. 파로크 불사라는 프레디 머큐리의 원래 이름이었다. 이 묘비에 적힌 출생일과 사망일은 프레디 머큐리와 동일했다.
불어로 “내 모든 사랑은 언제나 네 곁에(Pour Etre Toujours Pres De Toi Avec Tout Mon Amour)”라는 문구와 함께 M이라는 이니셜이 붙어 있었다. M은 임종을 지켰던 메리 오스틴을 가리킨다고 주요 외신은 보도했다. 일주일 뒤 묘비는 사라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팬과 언론은 그가 살았던 집 체리 나무 아래와 고향 잔지바르, 자주 갔던 휴식처 스위스 몽트뢰에 흩어졌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무덤이 21년간 베일에 휩싸였던 이유는 자신의 개명 전 이름을 적은 까닭이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본명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파로크 불사라라는 이름은 프레디 머큐리라는 사람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프레디 머큐리의 이름 파로크는 고대 페르시아와 인도, 중앙 아시아 지역 이슬람교도와 조로아스터교도가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행운과 행복이란 뜻이 담긴 이 이름과 불사라라는 인도 성씨가 합쳐진 게 프레디 머큐리의 본명이었다.
그는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은 인도의 구자라트주에 적을 뒀었다. 그들은 ‘파르시(Parsi)’였다. 파르시는 7세기~8세기쯤 현재 이란 지역인 페르시아제국에서 이슬람교도에게 쫓겨 인도와 중앙아시아 등지로 향했던 조로아스터교도 이민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조로아스터교는 한때 페르시아제국 인근에 널리 퍼졌던 종교였다.
프레디의 부친 보미 불사라는 보호령 관리 공무원으로 잔지바르에 파견됐다. 거기서 프레디 머큐리를 낳았다. 그는 1954년 아들 프레디 머큐리가 8살이 되자 인도 본국으로 유학 보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62년 잔지바르로 돌아왔지만 다시 짐을 싸야 했다. 1963년 잔지바르는 영국 보호령에서 벗어나자마자 지역으로 흘러 들어왔던 인도인과 아랍인, 페르시아인을 살해하거나 대거 추방하기 시작했던 까닭이었다. 이때쯤 가족 전체가 영국으로 이주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69년 런던의 현재 웨스트런던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일링칼리지를 졸업했다. 1970년 스마일이란 밴드에 가입한 그는 1971년 밴드 이름을 퀸으로 바꾸고 자신의 이름도 프레드릭 머큐리로 개명했다. 그는 인도 유학 시절부터 자신의 본명을 잘 발음하지 못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자신을 프레드릭의 애칭인 프레디라고 부르도록 했다. 퀸 활동을 시작하며 그는 아예 성까지 바꿨다.
퀸의 1995년작 ‘Made in Heaven’ 재킷.
일각에서는 자신의 이름까지 바꾼 그를 ‘과거 세탁꾼’라고 부르기도 했다. 퀸의 전성기 때 공연 직후 자신을 찾아온 잔지바르 친구를 모른 척했다는 소문이 났었고 대학생 시절에 잔지바르나 인도 유학 시절 이야기를 주변에 거의 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특히 자신의 본래 성을 머큐리로 바꾼 걸 보면 더더욱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언론에 나서는 것도 극도로 꺼려했다.
허나 그의 모친은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프레디 머큐리는 평소 자신의 혈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말했던 까닭이다. 그의 이름을 곱씹어 보면 희미하게 답이 나온다. 조로아스터교에선 해가 진실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해에서 가장 가까운 ‘수성’을 진실의 배달부로 본다. 수성은 영어로 머큐리다.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다. 안팎으로 폐쇄적이었던 그는 무대에선 그 누구보다 화려했다. 관객이 하모니를 넣어야 하는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공연 전 특유의 목 풀기를 할 때 늘 혼자하지 않고 관객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마이클 잭슨을 스스로 만나러 가기도 했다. 역설적인 행동으로 진심을 풀어냈다. 곱씹게 만들었다.
그는 과거를 감추고 싶어 했을까. 노래하는 진실의 배달부이고 싶었을까. 그가 인터뷰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난 늘 페르시안 앵무새처럼 살 거야.(“I’ll always walk around like a Persian popinjay)”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보헤미안 랩소디 가사 ‘커밍아웃’ 암시? 프레디 머큐리의 첫 남자친구로 알려진 위니 커치버거. “이게 정말 현실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산사태 속에 묻힌 것처럼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어. 엄마. 난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쏴서 그는 이제 죽었어요. 내 삶은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은데 난 내 삶을 내팽개쳐 버렸어요. 엄마 당신을 울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가 내일 돌아오지 않더라도 꿋꿋이 살아가세요. 아무 문제 없잖아요. 모두들 안녕. 난 이제 가야 해요. 모두를 뒤로하고 진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때때로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기도 했어요.”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작업했던 작사가 팀 라이스는 “프레디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예전의 프레디 머큐리를 죽인 겁니다. 이성애자였던 자신을 죽인 거죠”라고 한 바 있었다. 실제 프레디 머큐리는 죽을 때까지 양성애자라고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그와 함께했던 건 마지막 남자친구 짐 허튼이었다. 이제껏 알려진 프레디 머큐리의 첫 남자는 1983년에 만난 오스트리아 남자 위니 커치버거(Winnie Kirchberger)였다. 프레디 머큐리의 상징인 콧수염은 위니 커치버거에게 영감 받았다고 알려졌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