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이 2016년 12월 최순실 청문회에 참석한 모습. 박은숙 기자
알프스는 이화여대 여성최고지도자 과정(ALPS: Advanced Leadership Program Society)의 영어 이니셜이다. 글자 그대로 ‘앞서 나가는 리더들을 교육하기 위한 모임’이다. 이화여대가 1995년 1기 수업을 개설한 이후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졸업해 화제가 됐다. 기수 당 50여 명을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윤옥 여사,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장 등이 알프스 출신이다. 한 알프스회 회원은 이렇게 전했다.
“3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한다. 그 시간 동안 배우면 뭘 얼마나 배우겠느냐. 그래도 비싼 등록금(500만 원 안팎) 내고 다니는 이유가 따로 있다. 대부분의 최고지도자 과정이 그렇듯 인맥을 쌓기 위해서다. 더군다나 알프스는 돈 많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이런 종류의 과정 중 가장 클래스가 높다고 평가 받는다. 여기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 가서 말도 하기 어렵게 됐다.”
이 회원의 마지막 말처럼 지금 알프스회는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 도마에 오른 이후부터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 장모 김장자 삼남개발 회장이 알프스 총동창회장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각종 의혹이 봇물처럼 제기됐다. 김 회장과 최순실 간 친분이 화제를 모았고, 알프스회가 정유라 특례 입학에 관여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뒤를 이었다. 이화여대 학생회 측은 ‘알프스회가 정부와 이대의 연결고리이자 비선 실세 인재풀’이라고 주장했다.
박영수 특검에서도 알프스회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장자 회장 소유 골프장에서 회동을 가진 알프스회 회원들 일부는 참고인으로 조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박영수 특검에 몸 담았던 한 법조 관계자는 “알프스회 회원들의 비리들이 진술 등을 통해 나온 것은 맞지만 최순실 국정농단과의 연관성은 찾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아마 흐지부지됐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현 정권은 다시 알프스회를 주목했다.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왜 검찰과 특검이 수사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정권 출범 후 (알프스회와 관련된) 제보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알프스회 회원으로 알려진 한 사업가를 둘러싸고 수상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이 사업가뿐 아니라 알프스회 몇몇 회원들의 경우 정치권과 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사실상 로비스트 역할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문제가 된 알프스회 회원들은 대략 5~6명이다. 앞서 사정당국 인사가 언급한 사업가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별도로 모임을 만들어 자주 어울렸고, 여기엔 알프스 소속이 아닌 인사들도 참석했다고 한다. 이 모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한 알프스 회원은 “알프스회 안에서도 여러 개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다. 그냥 편하게 ‘알사모(알프스를 사랑하는 모임)’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안다. 사업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변호사 같은 전문직도 있었다. 나중엔 회원이 아니거나 심지어 남자들도 참석하면서 인원이 늘어났다”면서 “이들은 학교 밖에서 자주 운동(골프)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어울렸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들은 알프스 출신 유력 인사들과의 친분을 과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알프스회는 아니었지만 정권 비선 실세로 소문나 있던 최순실이나 굴지의 재계 회장들 부인 이름도 거론했다고 한다. 앞서의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알프스회의 거물급 이름을 단순히 팔기만 한 게 아니라 이를 인맥 쌓기에 적극 활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들과 알고 지냈는지는 차차 확인을 해봐야 한다”면서 “최순실의 경우 이 모임에 나왔던 적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귀띔했다.
그러다보니 재계와 정치권에선 이들에게 줄을 대려는 인사들도 있었고, 또 이 과정에서 부적절한 일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정당국이 겨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 대기업 임원의 경우 이들이 만난 자리에 간혹 참석해 용돈을 주는 등 ‘스폰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시계와 같은 고가의 선물까지 줬던 것으로 드러났다. 돈은 어디서 났는지, 또 왜 이 모임에서 거액을 지출했는지 등에 대한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이들이 정권 실세들과 가깝다는 소문이 난 것과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고 입을 모았다.
사정당국이 주시 중인 한 사업가는 정부가 발주한 입찰에 힘을 써준다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는다. 그런데 이 사업가에게 청탁한 건설사가 실제 공사를 따냈다는 점에서 외압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이 사업가는 모임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의 부탁을 받고 대기업 하청업체 선정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들은 대기업과 금융권 취업을 알선해주고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에도 휩싸였다. 앞서의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이 모임을 통하면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 취업도 가능하다는 소문이 강남 아줌마들 사이에서 퍼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알프스회는 고급 사교 모임으로 친목이 목적이었지만 이번에 수사선상에 오른 인사들은 이를 악용했다. 단순하게 영향력을 자랑하는 수준을 넘어 이득을 챙기려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임에 친박 정치인 ㄱ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에겐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2012년 대선 때 캠프 자금 관리에 관여했을 정도로 박근혜 전 대통령 신임을 받았다. 최순실과 참모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과 가깝다. ㄱ 씨가 이 모임에 속한 알프스 회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적지 않다.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무슨 사정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ㄱ 씨와 모임 회원들 사이에 여러 차례 돈뭉치들이 오갔다는 진술들이 확보된 상태”라고 전했다. 알프스의 또 다른 회원은 “딱히 직업도 없는 ㄱ 씨를 앞에 두고 모임 사람들이 쩔쩔 맸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권력 핵심들과 잘 아는 정치인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는 ㄱ 씨가 정권 실세들과 이 모임 회원들 간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