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아시안게임 대표팀 선발 관련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에 앞서 선동열 야구대표팀 감독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박정훈 기자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일부 야구인은 KBO 고위 관계자에게 조심스레 선동열 감독의 퇴진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들은 KBO 관계자는 “금메달을 획득한 대표팀 감독에게 어떻게 사퇴 얘기를 꺼낼 수 있느냐”면서 “선 감독을 사퇴시킬 명분이 없다”고 대응했다는 후문이다.
선동열 감독의 후배인 한 야구인은 “선동열 감독이 처음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면서 “4년 전 인천 아시안게임 때도 병역 면제 혜택을 받는 선수와 관련해서 잡음이 일었던 터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으로 믿었던 게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설명했다.
정운찬 총재가 국정감사에서 전임 감독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이후 선 감독은 사퇴 쪽으로 마음을 굳혔지만 KBO는 선 감독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 총재가 장윤호 사무총장을 통해 국감 발언의 진의를 해명했음에도 선 감독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터라 발표 시기만 조율 중이었다고 한다.
선 감독의 사퇴 발표는 KBO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깜짝 발표였다. 한때 선 감독이 스스로 물러나길 바란 이도 있었지만 선 감독이 아닌 정 총재한테 여론의 비난이 쏠리고 있는 상황에서 선 감독의 사퇴는 오히려 KBO와 정 총재에게 부담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선 감독이 기자들을 모아 놓고 사퇴 발표를 하기 전 정 총재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정 총재가 선 감독을 문까지 따라나서며 붙잡았다는 얘기는 씁쓸함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선동열 감독은 떠났다. 이제 KBO는 총재가 스스로 부정한 전임 감독제를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 이전처럼 국제 대회 있을 때마다 전년도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을 이끄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전임 감독제는 KBO 규약상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KBO 내부에서는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후임 감독 선임을 서두르기보다 전임 감독제 존폐 여부를 심도 있게 논의하자는 얘기도 흘러나오는 모양새다.
대니얼 김 해설위원(KBSN스포츠)은 전임 감독제 유지와 관련해서 “(전임 감독제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면서 “전임 감독제를 유지한다면 대표팀 감독한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야구는 A매치가 많은 축구와 달리 전임 감독의 할 일이 많지 않은 편이다. 2020 도쿄올림픽까지 아시안게임, 프리미어12대회 등이 잇달아 열리면서 전임 감독의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실제로 야구는 전임 감독이 꼭 필요한 종목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제도를 계속 유지한다면 전임 감독이 대표팀만 운영하는 게 아니라 유소년 관련 프로그램이나 프로 2군 선수들을 돕는 등 대표팀 감독이 해야 할 역할들을 정해 놓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즉 대표팀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대표팀 감독의 역할을 늘리는 것이다. 축구대표팀 감독와 달리 야구대표팀 감독은 야구장을 찾아가 프로팀 감독과 선수들을 만난다는 게 쉽지 않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선동열 감독도 야구장 방문을 어려워했을 것이다. 이런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대표팀 감독의 야구장 출입이 자연스런 현상이 되고 기자들도 대표팀 감독을 통해 현안 관련된 답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전까지 대표팀 감독이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면 앞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수반한 전임 감독제로 운영됐을 때 새로운 희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8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선동열 감독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이순철 SBS 해설위원도 전임 감독제를 유지하되 그 방식을 놓고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대표팀 감독한테 무작정 맡겨둘 게 아니라 감독의 역할과 관련해서 KBO가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처음 시행했던 전임 감독제다 보니 감독도, KBO도 서로 눈치보고 할 말 못하게 되면서 오류가 누적됐던 것 같다.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는 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정 난 사실이다. 모든 프로팀 감독들은 대표팀 감독 맡기를 부담스러워한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보다는 전임 감독의 역할에 권한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다. KBO도 이 기회에 여러 의견을 청취한 다음 합리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야구인들도 서로 비난하고 헐뜯기보다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 건강한 대표팀이 구성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어차피 KBO와 야구인은 같은 목표를 보고 가는 동행자 아닌가.”
단국대학교 스포츠경영학과의 전용배 교수는 “기본적으로 야구에서는 전임 감독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 교수는 “야구에 상비군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제 대회가 자주 열리지도 않은데 굳이 전임 감독을 내세워 대표팀을 운영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해설위원은 “그렇다고 이전처럼 프로팀 감독이 대표팀을 맡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가 대표팀 감독이 되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KBO도 지금은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면서 “하루 속히 후임 감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총재가 전임 감독제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서 후임자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출석해 있다. 박은숙 기자
한 야구인은 ‘일요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정운찬 총재와 장윤호 사무총장의 손발이 전혀 맞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총재 임기 1년 만에 레임덕이 올 수도 있다. KBO 외부에서 영입된 핵심 인사들이 이렇게 겉돌기만 하고 문제 해결 의지가 없다면 KBO는 또다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KBO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 총재와 사무총장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이 정도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정운찬 총재는 자신이 국정감사에서 했던 발언들과 관련해 정식으로 사과하고 한시 바삐 전임 감독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KBO도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야구의 미래를 위해 더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대니얼 김 해설위원은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총재가 아닌 커미셔너라면 야구장을 찾는 800만~900만 명의 야구팬들을 위해 좀 더 공격적인 비즈니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뜬구름 잡는 얘기 말고 보다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리그 운영 방침을 세웠으면 한다. KBO 조직은 굉장히 수동적이다. KBO 리그를 운영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앞으로 젊은 인재들을 많이 뽑아서 조직이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즉 사람에 대한 투자를 공격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KBO리그는 공식 유튜브 채널도 없고 SNS 활동도 거의 중단된 상태다. MLB 코리아가 오히려 SNS 활동에 열심이다. KBO리그 닷컴을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정운찬 총재가 진정한 커미셔너가 되려면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살펴보기 바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