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박중원 씨가 허위공시 혐의로 구속된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 측은 중원 씨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음에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처럼 속이고 돈을 빌려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원 씨는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외제차를 담보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리스차량이었다.
피해자 측은 “두산가 사람이 설마 돈을 갚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두산가 사람인 것은 확실하니까 별 의심 없이 돈을 빌려줬다”고 말했다.
피해자 측이 중원 씨 측에 빌려준 돈은 약 2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피해자 측은 “이번에는 돌려받지 못한 돈 중 일부에 대해서만 소송을 걸었다.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추가로 소송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피해자 측은 “예전에 (돌려받지 못한 돈 중) 4000만 원에 대한 소송을 걸었더니 돈을 갚겠다며 합의를 해달라고 해서 해줬다. 이후 4000만 원 중 일부만 돈을 갚고 연락이 끊겼다. 더 이상 중원 씨를 믿을 수 없어서 추가로 소송을 건 것”이라고 말했다.
중원 씨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의 조카이자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의 사촌이다. 두산그룹은 박두병 초대 회장의 뜻에 따라 3대 때부터 형제들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는 ‘형제 경영’을 해왔다. 중원 씨의 아버지인 고 박용오 전 회장은 1997~2004년까지 두산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두산가 4세인 중원 씨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원 씨의 아버지인 고 박용오 전 회장은 지난 2005년 3남인 박용성 당시 두산중공업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추대되자 강하게 반발하며 이른바 ‘형제의 난’을 일으켰다.
박용오 전 회장은 박용성 회장 추대를 앞두고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오너 일가의 비리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동생들은 박용오 전 회장이 2700억 원대 분식회계를 했다며 맞불을 놨다. 진흙탕 싸움 끝에 박용오 전 회장과 오너 일가가 무더기로 처벌을 받았다.
형제들 간 법정다툼 후 박용오 전 회장 일가는 두산가에서 완전히 제명됐다. 두산산업개발 상무로 있던 중원 씨도 해임됐다. 이후 박용오 전 회장 일가는 성지건설을 인수해 재기에 나섰다. 장남인 박경원 씨와 차남인 박중원 씨는 각각 부회장과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하지만 성지건설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건설업이 위축되며 실적부진을 겪었다. 박용오 전 회장은 사업부진을 비관해 2009년 자살했다.
박용오 전 회장은 유서에서 ‘자신과 함께 두산가에서 배제됐던 두 아들을 다시 두산가의 사람으로 받아들여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박용오 전 회장이 유서를 통해 부탁한 만큼 두산가가 조카들을 보듬어주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왔지만 이후에도 두산가는 두 사람과 선을 긋고 있다.
일요신문이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었을 때도 두산그룹 관계자는 “중원 씨는 두산그룹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 별다른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이후 성지건설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성지건설 부사장으로 있던 중원 씨는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성지건설은 2011년 충북지역 건설사인 대원에 인수됐다. 중원 씨는 성지건설 부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현재까지 별다른 대외 직함이 없다.
중원 씨는 지난 2013년에도 주변 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린 후 갚지 않은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당시 중원 씨는 피해자에게 자기 소유의 빌라 유치권만 해결되면 돈을 갚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빌라 소유주는 다른 사람이었다. 중원 씨는 2012년 11월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잠적한 후 도피생활을 하다가 2013년 3월경 한 당구장에서 검거됐다.
중원 씨는 앞서 2007년에는 허위공시 혐의로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아버지 박용오 전 회장이 사망했을 당시 구속 상태였으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중원 씨는 이번 재판에서 돈을 빌린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처음부터 갚을 의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기혐의는 과도하다는 것이다.
중원 씨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한 피해자 중에는 두산 베어스 출신 유명 전직 야구선수도 포함되어 있다. 중원 씨는 두산가라는 후광을 이용해 두산 베어스 선수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야구선수는 수천만 원을 빌려준 후 돌려받지 못했지만 중원 씨를 따로 고발하지는 않았다.
피해자 측은 “중원 씨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있다. 우리가 아는 피해자들의 피해 액수만 합해도 수십억 원은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피해자가 더 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다른 피해자들은 중원 씨를 고발하면 영영 돈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망설이고 있는데 우리는 돈을 못 받게 되더라도 괘씸해서 고발했다”고 말했다.
한편 중원 씨는 지난 10월 25일 선고기일에 불출석했다. 피해자 측은 불출석 이유에 대해 어떠한 통보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재판부도 중원 씨의 불출석에 매우 당황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원 씨의 불출석으로 선고기일은 한 차례 연기돼 오는 11월 29일 열린다. 중원 씨는 동종 전과가 있는 데다 피해자와 합의도 이뤄지지 않아 구속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중원 씨는 피해자가 한번 합의를 해줬는데도 채무변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재판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최초 선고기일에 출석하지 않은 것도 구속을 예상하고 불출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중원 씨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현재 변호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에 수차례 연락을 취해봤으나 답변이 없었다. 중원 씨의 연락처도 번호가 바뀌었거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