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먹고 사는 정치인들. 때론 그들의 말이 국민들을 화나게 한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모든 것 내려놓겠다!
첫 관용구부터 독자들은 혈압이 올라간다. 이 말은 정치인들의 관용구 중 가히 ‘약방의 감초’ 격이다. 정계에 입문한 사람치고, 이말 한 번 안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정치인들이 이도저도 안되겠다 싶으면 결국 마지막 가서 꼭 꺼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동안 도대체 어깨위에 뭘 짊어지고 있었기에 그럴까.
물론 본뜻은 정치인 본인이 가진 당 안팎의 지위와 권위 및 권력, 더 나아가서는 인간적인 욕심까지 다 내어 놓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상은 딱히 내려놓는 것이 없다는 게 함정이다.
보통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대패하거나 뭔가 단단히 잘못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곧잘 꺼낸다. 지난 6월 지방선거 당시 패배의 고배를 마신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선거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내려오면서 이 말을 쓴 게 대표적이다.
박은숙 기자=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
혹은 선거를 앞두고 하마평에 곧잘 오르내리는 후보군 정치인들이 공천 탈락을 예감할 때, 아니면 당 안팎에서 후보 단일화를 요구받을 때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잘 쓰는 관용구이기도 하다. 이 말 한마디면 뭔가 자기희생을 강조하면서도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포지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재보선 당시 고 노회찬 후보 지지선언과 함께 후보직을 내려놓고 훗날 총선에서 원내에 입석한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역설적이게도 당직 경선이나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가 이 말을 쓰기도 한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전당대회 출마에 앞서 이 말을 썼다. 이에 앞서 당 대표 시절 문재인 대통령도 민주당 대표직을 수락하며 이 말을 꺼냈다.
대략 이 말을 쓰는 당사자들은 권좌에 올라도 그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수평적 자세를 취하겠다는 의미지만 대부분 공천권 등 거침없이 권력을 휘두르곤 한다. 다행히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유권자도 당내 인사들도 거의 없다.
최근엔 안민석 민주당 의원이 ‘혜경궁 김씨’ 논란 탓에 고역을 겪고 있는 이재명 경기지사에게 이 말을 슬며시 권하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위기를 모면하거나 대단한 결심을 했다고 어필하고 싶을 때 “모든 것 내려놓겠다” 이 말 한마디면 얼추 오케이다.
#‘국민’ 관용구면 만사 OK!
키워드로 따지면 정치인들 사이에서 ‘국민’만큼 만능적인 역할을 하는 관용구도 없다. 어찌보면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국민’이란 대상의 모호성이 그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이 모호하면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기에 ‘책임’이 생명인 정치인들에게 너무나 고마운 관용구다.
대표적인 케이스는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관용구다. 어렵사리 선거에서 승리한 당선자나 당에서 중책을 맡은 대표자들이 일성으로 곧잘 쓰는 관용구다. 이는 승리가 유력한 캠프에서 결과를 앞두고 연설과 메시지를 담당하는 보좌진들이 흔히 준비하는 소감 문구기도 하다. 최근에는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문재인 대통령이 이 말을 꺼내기도 했으며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시절 일성으로 내뱉었던 말로 유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대위원장 시절. 그 시절 박 전 대통령은 비대위원장 취임 소감으로 “국민만 바라보겠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물론 이 말을 기억하는 유권자들은 조금도 안지나 금새 초심을 잃어가는 정치인들의 모습에 혀를 차기 일쑤다.
그런가하면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정계를 잠정적으로 은퇴했거나 중앙무대를 떠난 정치인들이 슬그머니 복귀를 준비할 때 곧잘 쓰는 ‘국민’ 관용구도 있다. 바로 ‘국민의 부름’이다. 정치인들이 쉬는 동안 몸이 근질근질해질 때 정계에 복귀는 하고 싶지만, 딱히 명분이 없을 때 ‘국민의 부름’을 곧잘 들먹인다. 정작 이 말을 듣는 국민들은 “도대체 어떤 놈이 국민이냐”고 흥분하며 답답해 한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최근 복귀를 시사해 화제다.
지난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직에서 내려온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최근 정계복귀를 시사했다. 홍 전 대표는 그 배경으로 어김없이 ‘국민의 부름’을 이유로 댔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대선이나 지방선거 때 홍준표의 말이 옳았다는 지적에 힘입어...” 물론 그 ‘국민의 절반 이상’의 기준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회초리 달게 받겠다!
보통 선거에서 패한 당 지도부 인사나 소속 의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흔히 쓰는 관용구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참패한 자유한국당 지도부나 의원들이 라디오 게스트로 참여할 때 가장 많이 꺼낸 식상한 관용구이기도 하다.
지방에 내려가면 지도부의 실책으로 전세 역전이 어려울 때, 몇몇 후보들이 직접 바짓단을 올려 진짜 회초리를 맞는 퍼포먼스가 시전 되기도 한다. 실제 호남의 한 광역후보는 진짜 지역구의 중앙역 앞에서 바짓단을 올렸는데, 회초리를 든 보좌관에게 귓속말로 “다리 스윙에 맞춰 때려 달라”고 꼼수를 부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정치권에서 ‘회초리’는 잘 쓰이는 관용구다. 실제 퍼포먼스가 이뤄지기도 한다. 사진은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당시 경기지사 후보로 나섰던 정치인들. 연합뉴스
얼마나 이 관용구가 진정성 없게 들렸으면, 회초리 드립을 치는 정치인들의 짤을 두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내가 청테이프 감아서 방망이 들고 쫓아가겠다!”고 악다구니 쓰는 네티즌들도 수두룩하다.
그런가 하면 약간의 응용 버전도 있다. 선거판이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 “저를 OO당 혼쭐내는 회초리로 써 달라!”는 관용구다. 지난 총선때 호남에서 기성 집권 정당이었던 민주당을 밀어낸 국민의당 많은 후보들이 야무지게 썼던 관용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당장 내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되레 회초리를 맞을 위기에 처해 있다.
#살을 깎는 노력으로 반성하고 다시 거듭나겠다!
선거에서 참패한 정당은 흔히 지도부 총사퇴 카드를 꺼낸다. 그리곤 좋은 말로는 계파색이 없는, 솔직한 말로는 존재감 제로의 흐릿한 인물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당의 입맛에 맞는 비대위와 경우에 따라선 혁신위도 구성한다.
그렇게 선임된 비대위의 첫 일성 단골멘트가 바로 “살을 깎는 노력으로 반성하고 다시 거듭나겠다!”...주요 키워드는 #살을 깎는 #반성 #거듭나다. 역대 비대위 일성 모두 이 세 키워드를 두고 적절히 조합해 완성됐다. 이번 자유한국당 비대위도 바른미래당 비대위도, 그 이전에 민주당의 비대위도 비슷비슷했다.
여기에 좀 더 느낌 있는 비대위 멘트로 가공하자면, #사즉생의 각오 #발본색원 #괄목상대 따위의 무시무시한 한자성어를 곁들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비대위의 ‘관용구’를 듣는 국민들은 매번 리바이벌된 일련의 과정 탓에 눈살을 찌푸린다. 이를테면 “모든 걸 내려놓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기존 당내 인사들이 거침없이 ‘비대위 흔들기’를 시전하고, 갈등은 점입가경이 되며 제풀에 지친 비대위원장이 감정만 상해 내려가는 모습. 결국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과정들 말이다.
#우리가 지고 A 당이 이긴 이유? 유권자는 A 당 좋아서가 뽑은 게 아니다!
이글을 쓰는 기자마저도 이 관용구를 보면서 요즘 속된 말로 ‘깊은 빡침’에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빡침’이란 말이 품격 있는 기사에 어울리는 어휘라 볼 수는 없지만, 이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다. 이 말은 국민들을 화나게 하는 정치인 관용구 중 ‘끝판왕’ 되시겠다. 변형으로는 “A 당이 잘해서 이긴 게 아니다”가 있다.
보통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의 지도부나 소속 정치인들이 상대 정당의 승리를 깎아내릴 때 곧잘 사용한다. 어찌 보면 패배자들의 안타까운 ‘현실부정’이며, 또한 대단한 ‘정신승리’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국민들을 화나게 하는 이유는 실상 간단하다. 자신들의 패배 이유를 ‘유권자’ 즉 ‘국민’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적으로 좀 더 파고든다면, ‘국민의 선택은 우매했으며, 올바르지 못했음’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국민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OOO는 사퇴하세요!”
이은재 의원은 지난 2016년 10월 조희연 서울교육감에게 사퇴를 요구하며 이목을 집중시킨바 있다. 연합뉴스
이 관용구하면 그 누구보다 이은재 자유한국당 의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지난 2016년 10월 국정감사 당시 ‘MS오피스’ 등 소프트웨어 수의계약 의혹 문제를 두고 이 의원이 조희연 교육감을 몰아 붙이면서 ‘명장면’이 연출됐다. 이를 토대로 커뮤니티에는 각종 버전의 짤이 생산되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를 두고 ‘사퇴요정’이란 우스갯소리도 등장했다.
이 관용구는 이 의원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상대 정당 소속의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정치인들이 이를 지적하며 가장 쉽게 꺼내는 관용구가 바로 ‘사퇴요구’다. 물론 비슷한 부류의 정당 대변인 논평의 클로징 멘트로도 곧잘 등장한다.
물론 ‘책임’을 생명으로 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직’에서 물러나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째 국민들은 이 말을 내뱉으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정치인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을까. 이유는 간단한다.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2019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에 참석해 통화를 하고 있다.
이 관용구를 너무나 쉽게 쓰는 정치인들의 ‘내로남불’ 태도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이 있다. 지난 2016년 진경준 검사장 사태와 관련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사퇴를 요구한 바 있던 이 의원은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 당시와 이번 음주운전 사태 모두 당 안팎의 ‘사퇴요구’를 용감히 물리치며 주목 받았다.
특히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 당시 이 의원은 “이번 사건이 당 차원에서 지시된 것일 경우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며 셀프 사퇴 약속을 시행했지만, 약속은 저 멀리로 가버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