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박정훈 기자
불은 각급 법원 대표들로 이뤄진 전국법관대표회의가 당겼다. 이들은 11월 19일 사법 농단으로 물의를 빚은 법관들에 대해 국회가 탄핵소추 절차를 검토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투표에 참여한 법관 105명 중 53명이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까스로 과반을 넘긴 셈이다. 찬반 의견이 팽팽했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국민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대가 모아졌다고 한다.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공소장에 적시된 법관만 100여 명에 달하기 때문에 그 후폭풍은 거셌다.
법관 탄핵소추 절차는 지금까지 두 번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던 1985년 불법시위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박시환 판사가 지방으로 좌천되자 당시 야당이던 신한민주당이 인사권자였던 유태흥 전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부결됐다. 2008년엔 신영철 중앙지방법원장이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 사건을 특정재판부에 몰아주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으로 탄핵안이 발의됐지만 처리시한을 넘겨 폐기됐다. 이번 탄핵안이 발의될 경우 세 번째인데, 법원에서 먼저 요청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정치권에선 국회 통과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진 않는다. 탄핵안 발의에 적극적으로 나선 민주당 의석수는 129석이다. 재적의원 1/3이 찬성해야 하는 발의까진 무난하겠지만 가결을 위해선 과반인 150석이 필요하다. 자유한국당(112석)과 바른미래당(30석) 협조 없인 쉽지 않다는 얘기다. 설령 가결이 되더라도 법사위원장인 여상규 자유한국당 의원이 탄핵심판 소추위원장을 맡게 된다는 점도 변수로 꼽힌다. 판사 출신인 여 의원은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탄핵안 반대 목소리를 냈다.
여야가 뜨거운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사법부 내에선 상당수 판사들이 불만을 쏟아내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직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동료 판사들에 대해 탄핵안을 발의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하는 행위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무죄추정과 삼권분립 원칙에 위반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탄핵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다. 도대체 어느 선까지 탄핵하자는 얘기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 검찰 수사 중인데 탄핵을 해놓고 나중에 무죄가 나오면 어쩔 것이냐”라고 반문했다. 이어 그는 “국회가 판단해야 할 일을 왜 지금 사법부 판사들이 나서고 있는지 모르겠다. 명백한 삼권분립 위반”이라고 덧붙였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판사 대부분은 전국법관대표회의에 대해 성토했다. 앞서의 부장판사는 “그들에게 과연 대표성이 있다고 보는가”라고 말을 꺼낸 뒤 “보통 판사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길 꺼려 한다. 괜한 오해로 재판에 영향을 줄까 우려해서다. 그런데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판사들의 주장이 전체 입장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실제 지난 3월 꾸려진 전국법관대표회의 소속 판사는 119명이다. 이는 전체 법관(2933명)의 4% 수준이다. 또 다른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무기명으로 전체 판사들 투표를 해보면 아마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탄핵안 검토에 찬성하는 비율은 아마 20%도 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판사들은 현 정권 들어 잘나가는 우리법연구회 등 진보 성향 모임 출신들이 다수다. 또 정권 출범 후 양승태 대법원을 비판해 왔던 판사들도 적지 않다. 태생 자체가 공평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탄핵안과 같은 중차대한 안건을 논의하는데 우리 일선 판사들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사법부를 흔드는 것인지 납득하기 힘들다.”
이처럼 불만이 팽배하지만 판사들은 극히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했던 한 판사조차 “대표회의가 분명 전체 판사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그랬다간 적폐로 몰려 마녀사냥을 당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그래서 아마 다들 조심스러운 것 같다”고 했다. 한 부장판사는 “대표회의가 또 다른 권력이 됐다. 반대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표회의가 문재인 정부 들어 성골로 통하는 특정 단체 출신들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권력이 바뀌었다고 사법부까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사법부 일각에선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김명수 대법원 체제에서 이뤄진 중요한 의사 결정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이뤄지고 있는데, 누군가 배후에서 ‘기획’을 하지 않고선 일어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절대적인 중립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정치권력과 결탁한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까지 이어진다. 지방법원의 한 고위급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법농단 조사, 특별재판부 설치, 탄핵안 등 민감한 사안들이 다뤄지는 걸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정부-사법부-민주당의 몇몇 인사들이 주도하면서 서로 지원사격을 해준다는 것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입장을 정하면 민주당 의원들이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정부가 후속조치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국회에서 공청회나 토론회를 통해 여론을 조성한 뒤 이를 넘겨받아 사법부가 동조하는 사례도 있다. 이들 뒤에 컨트롤타워가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다.”
이를 두고 법조계 관계자들은 김명수 대법원 체제의 인적 구성 특성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그동안 비주류로 꼽혔던 판사들이 문재인 정부 들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현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이끌고 있는 판사들, 그리고 지금 잘 나가는 판사들 중 대부분이 전 정권에선 비주류였다. 김명수 대법원장 역시 지금처럼 될지 알았겠느냐”면서 “이들은 그동안 주류였던 판사들을 적폐 기득권 세력으로 보지만 정작 본인들은 수적으로 절대 열세다. 반격이 시작되면 감당하기 힘들다. 따라서 조직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선 전국법관대표회의와 같은 강경한 내부 친위 조직이나 국회 등 외부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