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민심은 지난해 대선을 기점으로 더불어민주당으로 넘어갔다. 호남의 전략적 선택과 야권 대안 부재 등이 맞물린 결과다. 이후 호남 내 반문(반문재인) 세력은 약화됐다. 판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호남 정계개편은 최상의 시나리오가 맞물릴 때만 이뤄지는 ‘종속변수’에 그칠 전망이다. 그래도 관전 포인트는 있다. 막후 조정자와 키맨 찾기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최준필 기자
호남 정계개편이 그 이전과 다른 점은 ‘기본판’과 ‘주도세력의 파괴력’이다. 당장 20대 총선과 비교하면 두 변수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2년 전 호남 정계개편은 당시 제1야당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 내 반문 세력이 주도했다. 제1야당 안에서 계파 패권을 놓고 싸우는 구조였다. 한 지붕 두 가족 체제에서 시작된 주도권 경쟁이 호남발 정계개편의 처음과 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여야 구도다. 두 가지의 결정적 차이는 ‘원심력’이다. 전자의 경우 호남 정계개편에 발동이 걸리면 당은 분열하는 구조다. 하지만 여소야대 구조에선 호남 정계개편의 물꼬가 트여도 여권 내 원심력이 증폭할지는 알 수 없다. 야권이 온갖 수사를 갖다 붙인 정계개편을 꿈꿔도 여권 구심력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판의 균열은 일어나지 않는다. 각기 다른 정당에서 원심력을 자극하는 것보다 한 당에서 맞붙는 게 원심력의 파괴력을 극대화한다는 얘기다. 현 바른미래당 소속인 안철수 전 의원이 새정치연합 안에서 혁신 전당대회를 고리로 문재인 대통령과 겨룰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정계개편 주도세력의 파괴력도 천양지차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신구 호남 정계개편의 가장 큰 차이는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의 존재 유무”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 2년 전에는 ‘안철수’라는 존재가 있었다. 안 전 의원은 당시 문 대통령에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로 꼽혔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당시 “통합 전당대회는 불가피하다”며 안 전 의원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안 전 의원이 광주를 찾아 ‘창조적 파괴’를 언급하면서 “(숱한) 조롱과 모욕을 인내해왔다”며 문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에 문 대통령이 “탈당은 명분이 없다”고 재차 거절하자, 안 전 의원은 2015년 12월 13일 “고난의 길을 가겠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문 대통령과 각을 세우던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과 김한길 전 의원 등도 탈당에 가세했다. 동교동계 원로인 평화당 권노갑·정대철 상임고문도 반문 이합집산에 힘을 실어줬다. 이들의 반란은 20대 총선에서 ‘녹색 돌풍’으로 이어졌다. 문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던 국민의당은 호남 28석 중 26석을 석권했다. 호남에서 시작된 균열이 정치권 전체를 뒤흔든 것이다. 역으로 경쟁세력은 원심력에 노출됐다. 당시 문 대통령 등 친문(친문재인)계는 ‘호남 홀대론’에 휩싸였다. 최소한 당시에는 경쟁관계인 포스트 주자 간 ‘시소게임’이 가능했다. 당시 반문계의 판 흔들기를 ‘호남발 정계개편’으로 부르는 이유다.
현재는 격세지감이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초와 비교하면 낮아지는 추세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과반은 유지하고 있다. 민주당 지지율도 40% 초반대를 오간다. 되레 분열한 야권이 나머지 절반 지지율을 놓고 나눠 먹고 있다. 민주당 이외 범진보 대권주자로 꼽히는 인사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 정도다. 안 전 의원은 존재감은 종적을 감췄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2년 전 호남발 탈당 쓰나미에 불을 지폈던 박지원 의원과 김한길 전 의원은 킹메이커에 가깝다. ‘호남 대권론’ 수식어는 문재인 정부 2인자인 이낙연 국무총리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따라다닌다. 야권이 총체적 난국에 봉착한 셈이다.
호남 정계개편의 물꼬가 트이려면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 하락 ▲바른미래당 내 영남파와 호남파의 결별 ▲보수대연합 시동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이 중 단 한 가지라도 발발하지 않으면, 호남 정계개편이 신기루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호남 정계개편의 막후 조정자인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2년 전 호남발 정계개편 과정에서도 사실상의 조력자 역할을 했다. 야권 한 의원은 “유승민 의원 등 바른미래당 내 보수파가 자유한국당으로 이동할 때쯤 ‘박지원 플랜’이 시작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박지원 정계개편’의 핵심은 손학규 대표 등 바른미래당 내 호남파와 먼저 손을 잡는 시나리오다. 2년 전 녹색 열풍을 일으켰던 ‘국민의당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대 총선 전 호남발 정계개편 당시에도 정치권 안팎에선 박 의원의 탈당을 놓고 ‘호남 구심점’ 확보를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끊이지 않았다. 일단 박 의원은 정의당을 제외한 야권통합에 군불을 지핀 상황이다.
그는 11월 8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야권통합에 대해 “제3세력, 제3당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안철수라는 가능성 있는, 특히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그런 대통령 후보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런 인물이 없으면 제3세력은 존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없는 상황에선 야권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이 레임덕(권력누수)에 진입하는 21대 총선 전 민주당과 한국당, 호남 신당으로 3분할한다면, 경우에 따라 민주당과 호남신당이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다. 박 의원이 반문연대에 선을 그으면서 야권통합을 주창하는 이유다.
다만 ‘박지원 플랜’의 최소공약수는 호남 정계개편으로 수렴할 것으로 보인다. 당·청의 동반 지지율 하락, 보수대연합, 야권 대안론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권통합 안에는 호남 정계개편이 들어가 있다. 야권통합을 최대 공약수로 던지고 최대한 실리를 추구하려는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바른미래당 한 의원은 “박 의원 구상은 바른미래당이 쪼개지면, 구 국민의당 출신과 통합하겠다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며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었다. 박 의원이 정계개편의 키맨으로 손 대표를 지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 의원은 “정계개편의 불씨는 손학규가 일으킬 것”이라며 “(현재) 바른미래당은 보수와 진보가 어색한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한국당이 어떻게 정비되느냐에 따라서 유승민 의원 등은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변수는 손 대표의 포지션이다. 현재 바른미래당의 양대 축은 안철수계와 유승민계다. 손 대표는 양대 주주의 완충 역할을 하는 중재자다. 문제는 보수대연합이 현실화했을 때다. 유 의원 등이 새로운 보수를 통한 정권교체 명분으로 탈당한다면, 정국은 사실상 양당제로 재편된다. 두 번의 뼈아픈 대선 패배를 맛본 안 전 의원도 보수대연합을 고리로 차기 대권 티켓을 거머쥐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손 대표의 중재자 역할론은 안개처럼 사라진다. 남은 것은 호남 정계개편 열차에 탑승하느냐 정도다. 손 대표가 호남 정계개편의 키맨이더라도 구심점은 막후 조정자인 박 의원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손 대표는 이와 관련해 측근들에게 “안 전 의원이 보수대연합에 합류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안 전 의원을 묶어두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판 짜기를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현실성이다. 안 전 의원이 독일로 출국한 이후 전화통화 등 양자의 소통 창구는 닫힌 것으로 알려졌다. 떨어진 시간만큼 양측의 거리도 멀어지는 모양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전직 의원은 “정치를 하다 보면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중요할 때가 있다”며 “정계개편 등 판 짜기가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현 국면에선 ‘안철수 대망론’이나 ‘손학규 대안론’ 등보다 박지원의 막후 조정론의 파워가 클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친문계 한 관계자는 “호남 정계개편도 반문연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때마다 나오는 재탕·삼탕 프레임”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재선 의원도 “반문연대는 명분도 원칙도 없는 이합집산”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