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정우에게 또 하나의 타이틀이 붙었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연기하면서 연출까지 하는 영화감독,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만큼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벌이는 화가에 이어 이번에는 ‘작가’가 됐다. 하정우가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를 내놓았다. 지난 몇 년간 기회 닿을 때마다 수없이 ‘걷기예찬’을 펼쳐왔던 그다. 이번 책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왜 걷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인간 하정우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매일, 누구나, 걷지만 하정우만큼 걷기는 어렵다. 그는 해외 출국 길에 강남부터 김포공항까지 8시간 걸어가기도 하고, 하와이에서 매일 40km씩 걷기도 한다. 촬영이 아닌 크고 작은 개인적인 일을 처리할 때면 서울 곳곳을 걸어 다닐 때도 있다. 강남에서 홍대까지 걷는 일은 그에게 가뿐하다. 그는 대체, 왜, 걷는 걸까. 그 시작은 2011년 한 시상식에서 내건 공개적인 약속에서 출발했다.
# ‘먹방’ 넘어 ‘걷기’…지금 하정우를 상징하는 키워드
하정우가 펴낸 ‘걷는 사람, 하정우’는 11월 23일 출간하자마자 4일 만에 4쇄를 인쇄했다. 그야말로 돌풍이다. 출연하는 영화를 통해 빠짐없이 티켓파워를 과시해온 하정우가 출판가에서도 그 이름값을 톡톡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가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는 하정우를 향한 대중의 관심이 반영된 결과이지만, 동시에 ‘인기배우와 걷기’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조합을 향한 호기심이 발현된 까닭이기도 하다. 하정우는 책에서 영화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취향과 지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걷는 행위는 자신이 숨 쉬고 일하고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는 설명이다.
하정우는 거의 매일 3만 보씩 걷는다. 촬영이 없을 때면 어김없이 찾는 하와이에서는 하루에 10만 보씩 걸을 때도 있다. 그의 팔목엔 늘 걸음수를 확인하는 피트니스밴드가 채워져 있다. 워낙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 보니 2012년에는 서울 강남의 한 골목에서 음주뺑소니 차량을 뒤따라 붙잡아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걷는 사람 하정’우를 펴낸 지 4일 만에 4쇄를 인쇄하여 이름값을 톡톡히 증명한 하정우. 사진제공 = 문학동네
하정우는 만약 자신이 걷지 않았다면 지금쯤 몸무게가 150kg은 족히 나갔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워낙 맛있게 먹는 덕분에 소위 ‘먹방’의 유행을 일으킨 주인공답게 그는 실제로도 먹는 걸 즐긴다. 잘 먹다보니 몸무게도 금방 늘 수 있지만 지금의 체중을 유지하는 비결은 역시 걷기에 있다.
하정우는 언제부터 걷기에 빠져들었을까. 그 시작은 2011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였다. 당시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시상자로 나선 그는 “만약 제가 상을 받는다면 국토대장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정우는 영화 ‘황해’로 상을 받았다. TV 생중계 시상식을 통해 공약을 내걸었기에 지키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그는 배우 공효진과 김성균 등 동료와 선후배 16명을 모아 국토대장정에 나섰다. 그 과정은 2012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577프로젝트’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 작품은 하정우의 연출 데뷔작으로 기록됐다.
최근 책 출판간담회에서 하정우는 “농담처럼 시작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577km를 걸었지만 그 과정을 마치고 그를 지배한 건 ‘성취감’이 아니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길 위에서의 내 모습을 곱씹어봤다”는 그는 “중요한 것은 길 끝에 있지 않고, 길 위에서 만나는 순간과 기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했다.
때문에 하정우에게 걷기는 힐링 그 자체다. 유쾌하고 시원스런 성격으로 보이고, 영화에서도 늘 관객에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매력적인 인물을 소화하지만 이를 완성하기까지 그는 상당한 부담과 스트레스에 놓이기 일쑤다. 실제로 하정우는 이번 책을 통해 2015년 주연과 연출을 맡은 영화 ‘허삼관’으로 겪은 어려운 시간을 털어놓았고, 그걸 극복한 계기 역시 걷기였다고 밝혔다.
# “5년 만에 책 내면서 정리하고 싶어”
하정우가 책을 낸 건 처음이 아니다. 2011년 첫 번째 에세이 ‘하정우, 느낌 있다’를 내놓은 바 있다. 당시에는 하정우가 몰두해 있던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책에 주로 담겼다. 7년 만에 출간한 두 번째 책에서 그는 왜 ‘걷기’를 꺼내들었을까. 이와 관련해 하정우는 “지금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어떻게 하면 주어진 시간에서 잘 쉴 수 있을까’였고,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걷기에 빠졌다”고 말했다.
하정우는 1년의 대부분을 영화 촬영과 후반작업, 개봉을 준비하는 데 쏟는다. 그 외 시간은 주로 하와이에서 보낸다. 틈만 나면 하와이로 날아가는 그는 특별할 것 없이 그저 걷는다. 사실 여행도 걷기 위해 떠난다. 아무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곳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정우는 “하와이에 가서는 진짜 걷기만 한다”며 “하루 평균 40km를 걷는다”고 했다. 워낙 자주 하와이를 가니까 이제는 현지 공항 관계자까지 자신을 알아볼 정도라고 말한다.
‘팀플레이’를 즐기는 하정우는 그 성격답게 절친한 동료들에게도 걷기를 전파하고 있다. 그의 인도로 걷기에 빠져든 인물은 배우 정우성과 주지훈이다. 올여름에는 영화 ‘신과함께’를 함께한 김용화 감독, 주지훈과 매일 아침 한강변을 걷기도 했다. 물론 걷는데도 그만의 방식이 있다. 오랫동안 걸으면서 터득한 자신만의 노하우다. 40분에서 50분을 걸은 뒤 반드시 10분은 휴식을 취해야한다고 강조한다. ‘50분 걷고 10분 휴식’을 ‘1교시’로 묘사하는 그는 “10교시까지 걸을 때도 있다”고 했다. ‘어마무시한’ 걷기왕의 면모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