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수능 시험 1교시 국어영역이 시작된 순간 수험생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곳곳에 있는 역대급 ‘괴물’ 문제들 때문에 ‘멘붕’에 빠진 수험생들이 부지기수였다. 특히 국어영역 31번은 질점 사이에서 정의된 만유인력을 설명하는 문제는 논란의 중심이었다. 문제 출제를 담당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불수능’ 논란에 대해 이례적으로 유감의 뜻을 전했다.
“좀 가혹하게 말하면, 출제기관의 전문성이 떨어진다”
‘공부의신’ 강성태 공신닷컴 대표는 2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2019년 수능 국어영역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강 대표는 “국어영역 31번 문제는 전문 지식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며 “문과학생들은 교과 과정에서 배우지 않는 내용이었다. 수험생들이 질점이라는 표현을 알 수가 없다. 교육과정평가원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국어영역 ‘불수능’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등장으로 1982학년도부터 1993학년도까지 11년간 시행된 학력고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능시험 도입 초기부터 국어영역은 수능시험 전체의 난이도를 이끌었다. 지문의 길이는 점점 길어졌고 까다로운 문제들이 등장했다. “1교시 난이도가 수능 난이도를 좌우한다”는 말도 이 때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7급 공무원 준비생들은 최근 수능 국어영역의 ‘괴물’ 문제들을 다시 풀고 있다. 부산에서 7급 국가직 시험 준비에 몰두해온 이 아무개 씨는 “최근 근처 00문고에서 수능 문제집을 샀다”며 “2015년도 이후 7급 공무원 국어영역 시험지의 지문 길이가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비문학 제시문을 빨리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서울 명문대를 졸업한 이 씨가 수능 문제들을 풀 때마다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씨는 “고등학교 시절 국어영역은 최상위권이었지만 지금은 80% 밖에 맞추지 못한다. 대학교 때 독해훈련을 하지 않고 놀고 다닌 것이 후회된다”며 “7급 시험이 글을 빨리 읽는 사람이 통과하기 쉽게 변했다. 수능 문제를 풀면서 오답이 늘어날수록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2015년 인사혁신처가 본격적으로 공무원 시험 문제 출제를 주관하면서 국어영역 문제들의 경향이 변하기 시작했다. 2014년 7급 국가직 시험지의 분량은 총 3쪽에 불과했지만 2018년 7급 국가직 시험지의 분량은 총 4쪽에 달한다. 7급 시험은 20문제 X 7과목 총 140문제를 140분 안에 풀어야 한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국어영역 때문에 1분 1문제 원칙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푸념도 들린다.
2018년 10월 13일 세종시 조치원중학교에서 지방공무원 7급 임용 필기시험을 마친 응시생들이 귀가하고 있다. 세종시 행정직의 경우 6명 선발에 352명이 지원, 58.7대1 경쟁률을 기록했다. 연합뉴스
국어영역 비문학 지문이 압도적으로 늘면서 7급 공무원 준비생들은 상당한 부담을 떠안게 됐다. 이에 대해 인사혁신처 시험출제과 관계자는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지문을 길게 하거나 비문학 지문을 추가하지 않는다. 국문학 박사와 같은 외부전문가들이 전문적인 식견에 의해 문제를 출제한다”며 “내용적인 부분에 대해 우리 공무원들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출제위원의 스타일이 반영된 것일 뿐이다”고 설명했다.
7급 공무원 시험에서 국어영역 지문 분량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국가공무원 7급 공채 필기시험은 1차 시험에 ‘공직적격성평가’(PSAT)를 도입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PSAT는 5급 공채와 같이 언어논리·자료해석·상황판단 등 3개 영역을 평가한다. PSAT는 성실함과 다소 거리가 있고, 수능 국어영역에 강한 학생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이 강사들의 중론이다.
앞서의 7급 공무원 준비생 이 씨는 “PSAT는 수능을 갓 치른 사람이 유리하다. 지문 길이를 늘리면 상대적으로 젊고 머리가 생생한 수험생이 잘할 수밖에 없다”며 “고전적인 암기 위주의 학습에 익숙한 수험생들이 점점 국어영역을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국가시험이 수능과 유사하게 바뀌는 부분이 과연 본질에 맞는 정책인지 모르겠다”이라고 설명했다.
수능 문제집은 공기업 준비생에게도 ‘필수템’으로 자리잡았다. 2015년 공기업에 도입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의 의사소통능력 출제 지문은 공기업 준비생들에게 ‘제2의 수능’으로 통한다. NCS는 보도자료, 비문학지문 등을 짧은 시간에 빠르게 풀어내는 능력을 측정한다. 대형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는 공기업 준비생들의 수능 비문학 문제집에 대한 ‘구매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018년 8월 7일 한 공기업 준비생은 “NCS를 위해서 초반에 문장 독해력을 늘리려고 책을 샀다”며 “과학지문이 특히 어려웠다. 고등학교 때 대체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었는지 실감이 안 간다”고 밝혔다. 다른 준비생은 “공기업 준비를 위해 풀고 있는데 어려운 지문들이 너무 많았다. 고3 비문학 수준이 이렇게 높았는지 헷갈릴 정도다”고 덧붙였다.
교육 전문가들은 취업 준비생들이 수능에 몰두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앞서의 강성태 대표는 “공무원 공기업 시험의 출제 방향에는 공감한다. 많은 자료를 빠르게 받아들여서 정책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중요하다”며 “하지만 다른 나라 청년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새로운 기회에 도전 중이다. 청년들이 다시 수능 국어영역을 푸는 현상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고3으로 회귀하는 현상 자체가 슬픈 현실이다”고 지적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