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의 무용수가 호방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처용무.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 김중섭의 공연 모습이다.연합뉴스
처용무는 궁중 연례(宴禮)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기원하거나, 음력 섣달그믐날 악귀를 쫓는 의식인 나례에서 복을 구하며 춘 춤이다.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5방)에서 5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어 ‘오방처용무’라 불리기도 한다. 한국의 궁중무용으로는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탈을 쓰고 춤을 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용무는 다음과 같은 ‘처용 설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9세기 후반 신라 제49대 국왕인 헌강왕이 행차하여 울산시 인근 개운포(오늘날의 황성동 세죽마을)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왕이 짙은 운무가 낀 하늘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일관(길일을 잡는 사람)이 이렇게 아뢰었다. “이는 동해의 용이 부리는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해 이를 풀어야 합니다.” 이에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자, 먹구름이 걷히고 동해 위로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솟아올라 춤을 추었다. 그 중에 ‘처용’이라는 이름을 지닌 한 아들이 헌강왕을 따라 경주로 왔다.
처용은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고 관직을 얻어 경주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려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처용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이때부터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악귀를 몰아내고 복을 구하는 민간신앙이 싹트고, 처용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처용무가 나례의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처용무는 남성 혹은 여성 무용수 1인이 공연하였으며 ‘처용희’(處容戱)라 불렸다. 나례의식뿐만 아니라 궁중 연회나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 등 다양한 행사에서 연희(공연)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처용무는 좀 더 체계적으로 변모하며 남성 무용수 5명이 함께 추는 궁중무용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월 25일자에는 세종이 처용무를 관람한 뒤 “이후로는 처용무에 기생을 쓰는 일을 그만두고 남자 재인을 쓰라”고 관습도감에 지시를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처용무는 음력 섣달그믐날에 묵은해의 역신과 사귀를 쫓기 위해 행하는 궁중 나례의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연행됐다. 5명의 무용수는 각각 오방을 상징하는 흰색·파란색·검은색·붉은색·노란색의 의상을 입고 다양한 형식의 반주 음악과 노래에 맞춰 장엄하고 호방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동서상대무와 오방회무(오른쪽). 사진=문화제청 제공
그러나 처용무는 연산군 시대에 커다란 변화를 맞았다. 연산군은 세종의 명과는 반대로 “처용무를 기녀들에게 가르쳐 연향(잔치) 때 사용하라”(연산군 10년 12월 13일)고 지시하는가 하면, 술에 취해 자신이 처용무를 추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왕명으로 전국에서 모집한 기녀, 즉 흥청(興淸) 중에서 늘씬하고 자색이 있는 30인을 선발해 풍두무(연산군이 처용무를 개칭한 이름)를 배워 미인처럼 춤추도록 했다. 남성적이고 호방한 처용무가 여성적인 궁중의 춤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 윤씨가 모함으로 폐위돼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는, 처용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며 칼을 휘둘러 할머니인 대왕대비(소혜왕후)를 위협하기도 했다(연산 11년 10월 9일). 소혜왕후에게는 처용탈이 그 어떤 역신보다도 무서웠을 법하다.
처용무에서 무용수들이 쓰는 처용탈은 팥죽색 피부에 치아가 하얗고 귀에는 납 구슬을 단 주석 귀고리가 달려 있다. 또한 이들이 쓰는 검은색 사모(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 위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2송이와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적 성격의 복숭아 열매 7개가 꽂혀 있다. 이국적인 모습의 처용 형상을 보고, 처용을 아랍인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된다. 신라와 서역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신라 사회에 정착해 있던 이슬람 상인의 낯선 모습이 당시 신라인들에게 매우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벽사진경(요사스러운 귀신을 쫓고 경사로운 일을 맞이함)의 의미를 지닌 설화의 재료가 되지 않았겠느냐는 추정이다.
그 진위가 확인되기는 어렵겠지만, 처용무는 적어도 110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 동안 궁중과 민간에 이어지며 독특한 형식을 지닌 벽사와 구복의 무용으로 발전해 왔다. 특히 오방의 신들이 추는 처용무에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철학이 깃들어 있고, 처용탈의 제작 과정 또한 장인의 빼어난 기량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 2009년 유네스코는 처용무의 독특한 가치를 인정해 인류무형무산 목록에 등재했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