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전에서 맞붙은 현역 프로기사 박승문 7단(왼쪽)과 조민수 아마 7단.
[일요신문] 서울 시내에 북극 한파가 몰아쳤다는 뉴스가 나왔던 12월 첫 주말, 압구정기원에서 ‘2018 압구정 왕중왕전’이 열렸다. 전국 어디를 가도 강1급이라 불리는 쟁쟁한 고수들이 대국에 목말라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바둑 양산박’이 압구정기원이다. 참가선수 전원을 모두 우승후보라 불러도 무방할 진짜 왕중왕전이다. 바깥은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27년 역사가 숨 쉬는 기원 안 20평은 끓어오르는 승부 열기로 이틀 동안 뜨거웠다.
압구정 왕중왕전은 작년에 이어 2회째 열렸다. 올해는 현역 프로기사 김일환, 김종수, 정대상, 박승문 네 명을 포함해 총 48명이 참가했다. 아마와 프로기사의 대국에선 1집반을 공제하는 룰도 있었다. 대국시간은 기본 15분에 한 수에 20초가 더해지는 피셔방식으로 우승은 300만 원, 준우승이 120만 원, 공동 3위(2명)는 60만 원 등 16위까지 상금이 있었다.
8일 토요일은 4인 1조 더블일리미네이션 예선과 본선토너먼트 24강전과 16강전이 치러졌다. 본선 24강에서 김일환 9단이 같은 프로기사 박승문 7단과 대결에서 패했다. 정대상 9단도 외대 간판스타 박윤서에게 져 탈락했다. 16강부터 상금이 있는 대회라 약간 아쉬웠던 정대상은 “종일 뒀는데 아무것도 없네”라면서 허허롭게 웃으며 퇴장했다.
2018 압구정 왕중왕전 우승자 박승문 7단.
점심을 먹고 이어진 4강에선 박승문이 권병훈 대마를 잡고 먼저 이겨 느긋하게 김희중-조민수의 준결승전을 구경했다. 종반 김희중은 빠르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한 10집 부족한가?”라고 주변을 둘러보며 불계를 선언했다. 결승전을 앞뒀지만, 복기는 길었다. “20년 후에 따낼 자리였다”, “여길 뻗는 사람이 어디 있어. 무조건 젖혀야지”, “난 인정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이여” 등 복기에서 오가는 거친 기원 용어들로 귀가 즐겁다.
프로 7단 박승문과 아마 7단 조민수가 마주한 결승전. 최종 승자는 박승문이었다. 엎치락뒤치락 반전을 거듭하다 승리한 박승문은 부처님 얼굴을 하고 말없이 웃고 있다. 복기를 마친 ‘손오공’ 조민수는 뚱한 표정으로 “나야 다음에 우승하면 되지”라면서 입맛을 다신다. “역시 프로는 다르네. 대책이 없는 자리에서 기가 막히게 빠져나가”라며 끝까지 관전하던 70대 노 고수가 감탄한다.
64년생 박승문은 89년 입단해 주로 보급과 교육에 전념한 프로기사다. 국후 인터뷰에서 박승문은 “먼저 압구정기원과 이 대회를 후원한 한윤용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시니어기사들이 승부를 위해 바둑을 가다듬을 대국이 거의 없다. 나도 올해 시니어리그에서 성적이 안 좋아서 녹슨 칼을 닦는 심정으로 3개월 전 김종수 사범 소개로 압구정리그에 참가했고, 이번 대회도 나왔다. 사실 89년 입단하고 첫 우승이다. 내가 실력이 앞섰다기보단 상대 대국자 실수로 많이 이겼다. 대회 참가하신 선수들 평균 나이가 많아 아무래도 실수가 많이 나온다. 조민수 아마 7단과는 첫 대국이었다. 결승전은 내용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아주 어려웠다”라면서 “바둑은 재미가 첫째다.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재미를 가장 우선해서 가르친다. 압구정 기원에선 바둑도 재미있지만, 서로의 주장이 극렬하게 맞붙는 복기도 아주 즐겁다. 바둑 한판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주 많다. 한판 두고 웃고 즐기는 모든 과정이 바둑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바둑에서 접할 수 없는 기원 바둑만의 매력이다”라고 말했다.
2018 압구정왕 중왕전 시상식을 마치고.
대회 후원자 W·H 솔루션 한윤용 대표는 “고교선배 박윤서 사범 소개로 압구정기원에 온 지 2년 반이 되었다. 참가비 내고 리그에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원 사정도 듣게 되어 조금씩 후원을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내세우기 위한 후원이 아니다. 이 기원과 여기에 오는 바둑인들만은 끝까지 함께 가고 싶다. 나이 들어 가장 좋은 취미가 바둑이다. 요즘은 골프 등 다른 취미는 모두 끊고 바둑에 전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 대표는 압구정기원에서 열리는 여류아마최강전과 왕중왕전은 물론 내셔널리그 ‘압구정기원팀’도 후원하고 있다.
모두 짜릿한 손맛을 느끼기 위해 모두 북극한파를 뚫고 이 자리에 왔다.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에 김희중은 옆자리 앉은 권병훈에게 “비공식으로 우리끼리 3위를 가릴까?”라고 능글스럽게 제안한다. 김희중은 “날 사범이라 우대하지 마라. 여기 ‘삼번’님들이 많이 계신다”라는 아재개그로 들뜬 기원 열기를 식혀주고, 고개를 돌려 다시 19선 미로에 빠져들었다.
대회가 끝나도 바둑은 끝나지 않았다. 기원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며 정감 어린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고수가 두는 옆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있다 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흘러간다. 한때 한국기원이 추진하던 사업 중에 바둑전용 경기장이 있었다. 그런데 우린 이미 전용 경기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서울 압구정기원 기료는 하루 이용에 8000원이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