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선 ‘라면의 아버지’ 안도 모모후쿠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1930년대 젊은 시절의 안도.
안도 모모후쿠는 1910년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 자이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포목상을 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이때 장사 노하우를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장사가 좋았던 안도는 1932년 섬유 도매회사를 창업, 젊은 나이에 제법 큰돈을 벌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는 환등기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잇달아 참숯과 판잣집 제조업에 눈을 돌렸는데, 신기하게도 손대는 사업마다 소위 대박이 났다. 이처럼 모든 사업을 성공시킨 비결은 뭘까. 안도는 생전 자서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하고 주변을 살피면 얼마든지 사업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 좋은 날들만 계속되진 않았다. 이후 안도는 몇 번의 실패와 불행을 겪는다. 우선 전쟁 중 국가에서 지급한 자재를 횡령했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다 45일 만에 풀려났다(최종 무죄 석방). 1948년에는 탈세 혐의로 수감(1950년 무죄 석방)됐고, 1957년에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신용조합이 파산해 무일푼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안도 나이 47세. 툭 터놓고 말하자면, 적지 않은 나이에 불행을 경험할 경우 대부분은 재기를 꿈꾸지 못하거나 절망의 나날을 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안도는 멋지게 성공했을뿐더러 세계 음식문화에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큰 발자국을 남겼다.
힌트는 전쟁 후 암시장에서 발견했다. 굶주린 사람들이 포장마차 라면집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선 광경이 안도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실은 전부터 식량부족 사태를 지켜보며 식품사업에 뛰어들 결심을 하고 있던 터였다. 만약 집에서도 라면을 손쉽게 만들 수 있다면 ‘분명 수요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최초의 인스턴트라면 ‘치킨라면’(왼쪽)과 최초의 컵라면 ‘컵누들’.
당장 집 마당에 오두막 실험실을 지어놓고 밀가루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면서 라면 개발에 몰두했다. 풀어야 할 숙제는 간편성과 보존성의 양립. 그러던 중 부인이 튀김을 만드는 걸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고온에 튀긴 면은 수분이 쏙 빠지는 대신, 무수한 구멍이 뚫린다.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수분이 흡수되어 다시 면발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또한 면을 기름에 튀겨 건조시키면 장기보존도 가능하다. 오늘날 ‘순간유열건조법’이라 불리는 인스턴트라면 제조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다만 문제는 안도가 빈털터리에 동업자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47세 실직자의 재기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직원이 없으니 가족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아내가 스프를 만들고 아이들이 면을 봉지에 담으면 안도가 일일이 접착기로 밀봉했다.
안도는 자서전에서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집안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나는 가족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닭 육수를 좀 더 가져오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나중에는 ‘치킨’ ‘치킨’이라고 외치게 됐는데, 상품명이 치킨라면으로 정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958년 8월 25일, 안도는 세계 최초 인스턴트라면인 ‘치킨라면’을 세상에 내놓았다. 끓는 물에 간편하게 완성되는 ‘마법’의 라면은 맛까지 좋아 불티나게 팔렸다. 때마침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는 시기와 맞물렸기 때문에 슈퍼마켓 등 대량판매 루트도 열렸다. 그야말로 인생 대역전이 아닐 수 없었다.
긴자의 보행자 천국에서 컵누들 시식 및 판매를 한 것은 안도의 아이디어였다.
두 번째 전환기가 된 것은 1966년 미국과 유럽 출장이었다. 안도는 현지인들에게 치킨라면을 권하던 중 그릇이 없어 난감했다. 그런데 종이컵에 포크로 라면을 먹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안도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 컵에 든 인스턴트라면을 만들자.’
귀국 후 그는 즉시 신상품 개발에 착수했다. 치킨라면 때와 달리, 안도는 이미 수많은 직원을 거느린 ‘닛신식품’의 사장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연구를 거듭했다. 발포스티로폼으로 용기를 만들고, 건더기는 프리즈드라이(동결건조) 공법을 이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담은 ‘컵누들’이 완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9월,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선보였다.
‘주간겐다이’에 따르면 “컵누들 판매 방식에서도 안도의 아이디어가 빛났다”고 한다. 주말이면 도쿄의 긴자 거리는 차 없는 보행자 천국이 되는데, 안도는 이곳에서 시식 및 판매를 실시했다. 당시만 해도 ‘길거리에서 서서 음식을 먹는다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안도는 그즈음 ‘미국에서 건너 온 맥도날드 1호점이 오픈했다’는 데 주목했다. 그의 예상대로 장발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긴자 한복판에서 컵누들이나 햄버거를 먹는 모습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칠전팔기’의 삶을 달리고 달려온 안도는 매일 라면을 먹으면서도 96세까지 장수했다.
200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안도는 명예회장이 된 뒤에도 신제품을 직접 맛보고 출시를 결정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특히 96세까지 장수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생전 건강비결을 묻자 그는 “라면과 주 2회 골프”를 꼽았다. 매일 한 끼 식사로 자신이 만든 치킨라면을 먹었지만,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까지 건강하다”면서 “라면이 세간의 인식처럼 건강에 해로운 건 아니다”고 장담했다.
2007년 1월, 안도는 급성심근경색으로 타계했다. 향년 96세. 평생 달리고 또 달렸던 삶이었다. “안도 회장은 재산을 다 잃었을 때 ‘내가 잃은 것은 단지 돈이 아닌가. 그만큼의 경험이 피와 살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그는 40대 후반 무일푼 실직자 신세를 딛고 당당히 성공했다. “신념만 있다면 인생 후반전에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몸소 증명한 셈이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