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미쓰백’은 한국 영화계에서 페미니즘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사진=영화 ‘미쓰백’ 제공
당시 ‘미쓰 백’의 흥행에 대해서는 영화인 모두가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증된 인기 장르도 아니었고, 주연인 한지민은 10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온전히 혼자 힘으로 끌고 가기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흥행이 보장된 이른바 ‘충무로 배우’들이 함께하는 것도 아니었다.
투자사를 시큰둥하게 한 ‘여성 서사 시나리오’도 처음부터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여성 감독, 여성 스태프, 여성 단독 주연으로 이뤄진 ‘미쓰 백’은 다른 영화들보다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에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영화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에 실패하면, 앞으로 어떤 투자사도 여성 서사 영화에 투자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여성 관객들이 힘을 모았다. 이른바 ‘쓰백러(미쓰 백+~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 er를 붙인 신조어)’라는 이름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영화 티켓을 구매해 흥행에 힘을 보탰다. 영화를 보러 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티켓만 구매한 뒤 “내 영혼이라도 영화관에 보낸다”며 SNS에 앞다퉈 인증 샷을 올리기도 했다.
소규모 상영이 이뤄지는 ‘비인기 작품’이었기 때문에 상영관이 줄어들자 여성 관객들은 직접 상영관을 빌리거나 연장 상영을 요청해 ‘릴레이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표를 살 돈이 없는 관객들을 위해서 여러 장을 대신 구매해 여성 한정으로 제공했다. 이들의 자발적인 ‘구매 촉진 활동’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미쓰 백’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미쓰 백’은 최종 관객 수 72만 명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한지민은 지난달 23일 제39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지난달 개봉한 ‘국가 부도의 날’ 역시 여성 주연 영화로 여성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만 이 영화는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는 만큼, 영화 자체에 페미니즘 성향이 가미됐다거나 ‘여성 서사’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여성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역시 김혜수 덕이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김혜수를 두고 “존재 자체가 페미니즘”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에서 여성 주연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고는 하지만 김혜수는 여전히 관객들 사이에서 높은 선호도와 지지율을 보여 왔다. 특히 쟁쟁한 남성 배우들 사이에서조차 묻히지 않는 그의 존재감은 여성 서사에 목말랐던 여성 관객들에게 유일한 해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다른 남성 배우들을 제치고 크레딧 가장 앞에 이름 석 자를 올린 김혜수를 보며 여성 관객들의 지지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지난 5일 개봉한 공효진의 ‘도어락’ 역시 여성 단독 주연으로 여성 관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공효진 스스로가 “성별을 나눠서 보는 영화가 아니다”라며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것을 밝히긴 했지만,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 대부분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렀던 여성이 추격자로서 반격에 나서는 모습이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리는 페미니즘적 시각에 걸맞다는 감상평이 이어졌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첫 여성 솔로 히어로 무비인 ‘캡틴 마블’은 내년 3월 개봉 전부터 ‘페미니즘’ 논란에 직면했다. 남성의 비율이 높은 마블 코믹스 팬덤은 “캡틴 마블을 불매할 것”이라고 거세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마블스튜디오 제공
내년 3월 개봉을 앞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첫 여성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 역시 여성 서사를 그린다. ‘캡틴 마블’ 역을 맡은 브리 라슨은 페미니즘을 지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영화 ‘캡틴 마블’을 “사람들을 위한 상징이 될 수 있는 거대한 페미니즘 영화의 일부일 것”이라고도 밝힌 바 있다.
다만 이처럼 밀물처럼 밀려오는 ‘여성 서사 영화’에 소외감을 느끼는 계층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은 이미 앞서 개봉한 ‘도어락’이 여성을 피해자로, 남성을 가해자로 규정했다는 이유만으로 ‘별점 테러’에 나서는가 하면, 페미니즘을 이유로 노출이 있는 복장을 입지 않는 여성 히어로 ‘캡틴 마블’은 개봉 전부터 불매 운동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캡틴 마블’의 경우는 남성 팬이 많은 마블 코믹스의 특성상 불매의 목소리가 매우 높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앞선 영화계 관계자는 이를 두고 “영화판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 예컨대 액션 영화나 범죄 스릴러, 히어로 영화에서 주연은 늘 남성이 맡고, 여성은 섹슈얼한 이미지로 소비되거나 감초 조연에 그치는 일들이 2018년 들어 파격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한 국가에서만 그친 게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라며 “그러다 보니 기존의 ‘마초 영화’에 익숙해 있던 남성 관객들의 경우 자신들의 ‘즐길거리’마저 여성들에게 빼앗긴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가 이뤄지는 과정이 너무 급격하다 보니 약한 불로 서서히 끓이듯 변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열탕에 들어간 느낌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