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서현 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연합뉴스
이서현 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이 지난 6일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동안 맡고 있던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직은 내려놨다. 이 이사장은 내년 1월 1일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이 소식은 재계와 패션업계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이 전 사장은 서울예술고등학교와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 패션 엘리트코스를 밟은 후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하며 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 전 사장은 지금까지 늘 국내 패션업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이번 인사로 이 전 사장은 16년 만에 업계를 떠난다. CJ그룹, 신세계그룹 등 범삼성가에서 3세가 경영일선에서 중도에 내려온 것은 이서현 전 사장이 유일하다.
삼성그룹은 이 전 사장이 모친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의 전철을 밟아 문화·복지사업에 주력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이 전 사장이 1남 3녀를 둔 ‘다둥이 엄마’로 아동과 청소년 복지에 관심이 많아 그동안 사업보다 사회공헌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를 종종 밝혀왔다는 것이다. 삼성복지재단 측도 “이서현 신임 이사장이 삼성복지재단 설립 취지를 계승하고, 사회공헌 사업을 더욱 발전시킬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삼성복지재단은 소외계층의 자립기반을 조성하고 복지 증진을 위한 공익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989년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서현 전 사장은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삼성미술관 리움의 운영위원장도 겸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이 많다 하더라도 그동안 공을 들인 패션부문을 그만둘 필요까지 있었느냐는 지적도 적지 않다. 오빠인 이재용 부회장도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지만, 삼성전자 부회장직도 유지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생명공익재단과 다르게 삼성복지재단은 드림클래스 장학사업 등 실제로 사업을 진행하는 게 있다. 드림클래스의 경우 호응이 좋아 그룹 차원에서 밀고 있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경영자의 마인드로 재단이 가진 재원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야 한다”며 “이서현 전 사장이 직접 나서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만큼 패션부문 사장을 겸직하면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 한 관계자는 “이 전 사장이 패션사업에 애정을 쏟아온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며 경영에 대한 욕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이 전 사장의 사임이 갑작스럽고 의아한 일”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사임의 주원인으로 가장 먼저 패션부문 실적 부진을 꼽는다. 이 전 사장은 2014년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경영기획담당 사장, 2015년 12월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등을 거치며 삼성그룹 패션사업부문을 진두지휘해 왔다. 이 전 사장은 오는 2020년 연매출 10조 원 달성을 전망했지만, 현실은 2조 원대 벽도 넘지 못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매출은 1조 7000억~1조 8500억 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 사이 영업적자는 2015년 89억 원에서 2016년 452억 원까지 확대됐다. 이듬해 부실사업을 정리하면서 326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다시 실적이 악화돼 올해는 3분기까지 매출 1조 2650억 원에 영업적자 125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참담한 실적을 기록한 데는 이서현 전 사장이 기획 단계부터 주도한 SPA 브랜드 ‘에잇세컨즈’의 실패가 치명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2년 론칭한 에잇세컨즈는 2016년 9월 중국 상하이에 플래그십 매장을 열며 중국시장 진출을 두드렸다. 하지만 다른 해외 SPA 브랜드와 차별화에 실패하며 경쟁에서 밀렸다. 중국 등에 쌓인 재고 물량이 돈으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또 캐주얼 브랜드 빈폴의 스포츠웨어 진출도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반면 패션부문 경영실적 부진이 퇴진의 이유는 아닐 것이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재계 한 인사는 “전문경영인은 실적이 부진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룹 오너 일가는 다르다“며 ”특히 총수 자제들의 사업이 잘 안 되면 오히려 독려하고 지원해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우리나라 재벌들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 전 사장이 실적 부진 때문에 밀려났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2016년 12월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 연구담당 사장. 일요신문DB
삼성 내부 관계자들은 지난 6일 발표 당일까지도 이 전 사장의 거취에 대해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이번 인사를 논의하고 결정한 곳이 어딘지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그룹 미래전략실 해체 후 인사는 전자 계열사의 경우 삼성전자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에서, 비전자제조 계열사는 삼성물산 EPC경쟁력강화TF에서, 금융 계열사는 금융경쟁력제고TF에서 각각 진행한다고 알려졌다. 삼성 관계자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 전 사장은 오너 경영인으로서 일반 전문경영인들의 거취를 결정하는 것과 조금 다를 수 있다“며 ”본인이 사장직을 내려놓겠다고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앞의 재계 관계자는 “재벌 총수 일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경우 대개 그 안에서 갈등이 있게 마련”이라고 귀띔했다.
이서현 전 사장뿐 아니라 남편인 김재열 사장도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에서 사실상 한직으로 분류되는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 연구담당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부의 ‘동반 이선 후퇴’에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