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부 내륙 빈즈엉성(Bình Dương) 신한은행 지점 앞에 세워 놓은 박항서 감독의 입간판이 퍼레이드 한복판에서 발견됐다. 사진=한국 교민 제공
베트남이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은 15일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18 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1 대 0으로 제압해 최종 합계 3 대 2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AFF 스즈키컵은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린다. 베트남은 이 대회에서 2008년 우승한 이래 10년 만에 다시 정상에 섰다.
베트남은 1차전 원정에서 2 대 2로 비겨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고도 90분 내내 적극적인 경기를 펼쳤다. 전반부터 말레이시아를 몰아붙였다. 전반 6분 응우옌 아인득의 왼발 논스톱 발리슛은 결승골이 됐다. 후반 5분 코너킥 상황에서 실점 위기에 놓였지만 당반럼 골키퍼의 선방으로 위기를 넘겼다. 후반 추가시간 4분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베트남은 경기장을 찾은 4만여 국민에게 우승컵을 선사했다.
베트남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휘날리는 하노이 한복판. 사진=한국 교민 제공
경기가 끝난 뒤부터 베트남 전역은 붉은 색 옷을 입은 오토바이 군단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교민은 ‘일요신문’에 현지 상황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내왔다. 금성홍기와 태극기가 함께 휘날리는 장면부터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이 사진과 동영상에 가득 찼다. 교민 모두가 한입 모아 “2002 한일 월드컵 때 한국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박항서 감독의 기적은 갑자기 이뤄지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인 기적이었다. 2017년 9월 베트남에 부임한 박 감독은 국가대표팀과 함께 연령별 대표팀도 함께 맡았다. 1차 목표는 숙적 태국과의 승부였다. 식단에 고기를 많이 넣고 패스 기술 연마에 집중했다. 얼마 뒤 U-23 대표팀을 이끌고 나간 M150 CUP U-23 국제 토너먼트에서 주최국 태국을 꺾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태국을 꺾은 건 10년 만의 일이었다. 베트남은 늘 태국 벽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전임 감독이 계속 잘려나간 건 태국전 패배 탓이 컸다. 2016년 2월에 선임된 전임 응우옌 후이 탕 감독은 2017년 8월 2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사임했다. 2017 동남아시안게임 축구 경기에서 태국에게 0 대 3으로 패배한 직후였다. 응우옌 후이 탕 감독에 앞서 사령탑으로 있었던 일본인 수장 미우라 토시야 감독의 해임도 태국전 패배가 컸다. 2014년 5월부터 2년 계약을 맺은 미우라 토시야 감독은 2015년 10월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에서 태국에게 0 대 3 완패를 당했다. 2016년 1월 짐을 싸고 떠났다.
태국 숙원을 푼 박항서 감독은 대어 낚시를 떠났다. 올 1월 2018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 조별 리그에 출전했다. 베트남은 시리아, 한국, 호주와 같은 조에 편성돼 조 최약체로 분류됐다. 1차전부터 기적의 조짐은 보였다. 한국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고 페널티킥을 선방했다. 2 대 1로 패하긴 했지만 대등한 경기를 선보였다. 2차전에서 캥거루를 사냥했다. 응우옌 꽝 하이의 골로 호주에 1 대 0 신승을 했다. 3차전에서 시리아를 만나 무승부를 기록하고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우승 후보로 평가 받는 이라크와 3 대 3 무승부로 승부차기까지 갔다. 5 대 3 승리였다. 카타르와의 준결승전에서도 2 대 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 대 3으로 또 이겼다. 중동 모래 바람을 모두 잠재웠다. 우즈베키스탄과 만난 결승전에서 1 대 2로 아깝게 패배했다. 낯선 눈밭에서의 경기였지만 연장전까지 물고 늘어졌다. 연장 후반 종료 1분 전 안드레이 시도로프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헌납했다.
준우승이었지만 베트남 전체가 열광했다. 베트남 축구 역사상 아시아축구연맹 주관 대회 첫 결승 진출이었던 까닭이었다. 동남아시아 국가 최초의 결승 진출이기도 했다. 준결승전이 끝난 뒤 베트남은 이미 축제를 시작했다. 베트남 정부는 선수단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박항서 감독과 공격수 응우옌 꽝 하이, 골키퍼 부이 띠엔 중은 3급 노동훈장을 받았다. 숫자가 클수록 높은 훈장이다. 나머지 선수단은 1급 훈장이 가슴에 달았다.
8월부터 기적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8월 초 베트남에서 열린 2018 비나폰 4개국 초청대회에서 베트남은 팔레스타인과 오만을 각각 2 대 1, 1 대 0으로 잡고 우즈베키스탄과 1 대 1로 비기며 우승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태풍의 눈으로 급부상했다.
본선에서는 베트남은 네팔, 일본, 파키스탄을 상대했다. 전승행진이었다. 16강에서 바레인을 1 대 0으로 잡았다. 종료 2분 전 짜릿한 결승골이었다. 8강에서 만난 시리아를 연장전 승부 끝에 1 대 0으로 제쳤다. 베트남 역사상 아시안게임 축구 종목에서 8강과 4강을 간 건 처음이었다. 4강에서 한국에게 1 대 3으로 패했지만 베트남은 이미 용광로였다. 3·4위 전에서 패해 4위를 기록했다. 히딩크를 보좌했던 박항서 감독은 히딩크와 비슷하게 4강 신화를 달성했다.
11월 베트남은 다시 한 번 발톱을 가다듬었다. 2018 AFF 스즈키컵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라오스와 말레이시아를 잇따라 잡았다. 미얀마와 비기며 주춤하는 듯했지만 캄보디아를 밟고 조 1위로 4강 문턱을 넘었다. 참가국 10곳 가운데 유일한 조별리그 무실점이었다.
4강 상대는 쉽지 않았다. 명장 스벤 예란 에릭손과 외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를 한데 모은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은 2000년대 중반부터 특이한 축구부흥정책으로 국가대표팀 성장전략을 짰다. 세계 곳곳으로 퍼진 필리핀 엄마의 아들을 찾았다. 필리핀에 산 적 없지만 필리핀 국기를 달고 뛸 수 있는 조건의 외국 축구선수를 영입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카디프 시티에서 활약하는 골키퍼 닐 에더리지, 독일 분데스리가 2부 리그 아우에 소속 욘-패트릭 슈트라우스, 덴마크 리그와 루마니아 리그를 경험한 다이스케 사토, 오스트리아 연령별 국가대표였던 스테판 팔라, 볼튼 원더러스 유소년팀에서 축구를 배우고 영국 연령별 국가대표에서까지 활약했던 루크 우드랜드 등이 AFF 스즈키컵 명단에 포함됐다.
동풍이 불었다. 하늘은 박항서 감독 편이었다. 이 선수들 모두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리그 일정이 빡빡했던 소속팀은 선수들에게 2018 AFF 스즈키컵 8강까지만 시간을 허락했다. 필리핀의 전력 한 축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베트남은 1차전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2 대 1 승리를 거뒀다. 2차전도 똑같이 2 대 1 승리했다. 승리의 기운은 계속 베트남과 함께했다. 결국 우승컵은 베트남 차지였다.
‘베트남 익스프레스 인터내셔널’은 1일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수장으로 부임하며 설정한 목표 하나를 이미 이뤘다”고 알렸다. 11월 말 FIFA가 발표한 FIFA 랭킹 100위는 베트남 차지였다. 2018년 11월 초 랭킹 102위에서 두 계단 상승했다. 박 감독은 취임 때 “FIFA 랭킹 100위 안에 들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베트남의 FIFA 랭킹 100위 안착은 2011년 6월 이후 처음이었다. 감독 부임 이후 13개월 만의 성공이었다. 2018 AFF 스즈키컵 우승으로 겹경사는 계속 이어졌다.
상주 상무 수장이었던 박항서 감독은 2014년 3월 23일 전북과의 경기에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TV 장면에 담겼다. ‘슬리핑 원’이라고 조롱 받았다. 베트남 감독이 된 뒤 기존의 포백을 버리고 스리백을 기초로 한 선수비후역습 전술을 도입했을 때 현지 언론과 팬은 박 감독을 또 다시 ‘슬리핑 원’이라고 불렸다. 프로 리그에서 밀려 실업 리그 감독이나 하던 사람을 감독으로 앉혔다는 비난도 잇따랐다. 좋은 성적을 보이기 시작하자 ‘슬리핑 원’은 점차 세계적인 명장과 빗댄 ‘과로’디올라(과르디올라), Zzzi단(지단), 졸리뉴(무리뉴), 쿨쿨롭(클롭), 자미오네(시미오네) 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상황이 달라졌다. 최소 베트남에서는 그 누구도 박항서 감독을 누군가와 빗대지 않는다. 그는 이제 고유명사 ‘박항서’로 불린다. 그 자체가 전설이 됐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우승 트로피를 베트남 국민에게…한국에도 감사” 박항서 감독은 우승 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승해서 너무 기쁘다. 두 달 이상 나와 우리 선수들, 코칭스태프들이 우승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해 왔다. 우승하기까지 노력을 다한 선수, 코칭 스태프, 스태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특히 나와 선수들, 코칭스태프들은 베트남 국민의 많은 사랑과 격려를 받았다. 우승의 영광을 베트남 국민에게 돌린다. 또 감독 개인에게 사랑을 보내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사랑해주신 만큼 베트남 국민들께서 대한민국도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 베트남 국민들께 우승 트로피를 가장 먼저 드리고 싶다”며 우승 소감을 전했다. 이어 “2018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2018 AFF 스즈키컵까지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신 것에 너무나 감사 드린다. 축구 지도자라는 조그마한 역할이 조국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우호 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한국을 향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최] |
농식품부 함박웃음... 베트남 진출 대상, 동화제약, 신한은행도 덩실덩실 박항서 감독 덕에 한국 정부와 기업이 웃음 짓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농식품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7.9%가 증가, 농식품 수출실적은 반기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년동기 대비 27.5% 증가한 신선농산물이 주도했다. 인삼류와 과일 수출이 20% 이상 늘었다. 베트남으로 향하는 과일 수출은 특히 많이 늘었다. 박 감독이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인삼을 달여 먹었단 사실이 알려지며 베트남에서 고려인삼 판매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알려졌다. 충남 지역만 따지면 박항서 감독이 효자 그 자체다. 10월 말 기준 충남 농식품 수출액이 3억 4670만 4000달러로 집계됐다.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 다음으로 충남 농식품을 많이 사갔다. 1년 전 5위에서 두 계단 상승했다. 10년 전 1412만 달러에 불과했던 매출은 올 10월 기준 이미 4178만 달러를 달성했다. 2013년 최고 기록인 1억 471만 달러에 다시 도전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한류열풍과 농식품 홍보대사인 박항서 감독 등의 영향”이라며 “하노이에서 열린 케이푸드페어(K-Food Fair)에서는 컵 떡볶이 품목만 1000만 달러 이상 계약이 이뤄졌다”고 했다. 농식품부는 2월 27일 박 감독을 농식품 수출 홍보대사로 위촉한 바 있었다. 충청남도 관계자는 “박 감독이 농식품부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인삼, 딸기, 닭고기 등을 홍보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베트남 식품 회사 득 비엣 광고에 등장한 박항서 감독. 사진=득 비엣 대상과 동아제약, 신한은행도 웃고 있다. 박항서 감독은 현재 이들 회사 모델로 활동한다. 대상은 3월 박 감독과 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2016년 9월 인수한 베트남 식품 회사 ‘득 비엣’과 종가집 김치 광고를 박 감독에게 맡겼다. 대상에 따르면 7월 득 비엣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0% 이상 뛰었다. 박카스는 이웃나라 캄보디아에서 대표 음료가 됐지만 베트남에서는 자국 브랜드와 레드불 등 세계적인 브랜드에 밀려 있었다. 허나 박 감독 효과에 힘입어 점유율이 급속도로 상승했다고 전해졌다. 2018 AFF 스즈키컵 우승을 정점으로 더욱 굳건한 위치를 점유할 예정이다. 신한은행도 박 감독의 입간판을 지점 밖에 내걸며 좋은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