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번성하던 청자는 고려 말기에 이르면서 정치 사회의 문란과 왜구의 침입으로 그 제작이 점차 쇠퇴해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강진, 부안 등 주요 청자 가마마저 없어지게 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새로운 도자기에 대한 수요에 따라 분청사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분청사기는 퇴락한 상감청자에 그 연원을 두며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 시절 그릇의 질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 등이 크게 발전, 세련되며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백자가 서서히 그 위세를 떨치며 정부 직영인 관요에서 직접 백자를 만들어 왕실과 관아에 공급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더구나 임진왜란으로 분청사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납치되거나 사라지면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분청사기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된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초기의 분청사기는 청자의 영향이 진하게 남아 태토와 유약이 말기의 청자와 같고, 그 외형도 고려청자의 부드러운 선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는 더 풍만해지고 대담해 지며, 문양도 청자에서 흔히 쓰이는 학이나 연꽃 등에 머무르지 않고 물고기 나뭇잎 꽃 등의 사실적 문양을 생략하고 단순화시켜 재구성함으로써 청자나 백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높은 조형적 역량을 보여준다.
국보 179호로 지정돼 있는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粉靑沙器剝地蓮魚文扁甁·사진)은 그 특질을 가장 멋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편병이란 몸통이 둥글납작하며 주둥이가 달린 병을 말한다.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22.5㎝의 이 편병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담갈색을 띠며 정면은 대담하게 재구성된 연잎과 연꽃 사이로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충만한 생동감 속에 자유분방한 기운을 느끼게 하고 측면은 연꽃무늬를 기하학적으로 배치, 안정감을 준다. 분장 후 무늬 이외의 백토를 긁어내 흑백이 조화된 무늬를 만드는 박지(剝地)기법이 주로 사용돼 전체적으로 회색과 회갈색의 대비가 일품이며, 분장 후 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彫花)기법도 일부 사용돼 아기자기한 맛을 더하고 있다.
한동안 대가 끊어진 분청사기의 미를 근대에 들어 먼저 발견한 것은 부끄럽게도 일본인이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이를 미시마(三島)라 부르며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고미술학자 고유섭이 이를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 명명, 그 가치를 알리는 데 힘쓴 덕분에 분청사기라는 약칭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