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조의 선비 유득공은 특히 벼루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하루는 친구가 좋은 벼루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훔친 후 이런 시를 남겼다. ‘미불은 옷소매에 벼루를 훔쳐 온 일이 있고/ 소동파는 벼루에 침을 뱉어 가져간 일 있지/ 옛 사람도 그리 했거늘 나야 말해 무엇하랴’
벼루 뒤편에 소유자가 벼루에 대한 애정의 글을 새겨 넣은 연명(硯銘) 중에는 명문도 많다. 고려 때의 문장가 이규보는 ‘너는 한 치의 웅덩이에 불과해도 내 끝없는 생각을 펼쳐주지만 나는 여섯 자 큰 키에도 네 힘을 빌려 사업을 이루는구나’라 읊고 있고, 실학자 이가환의 아버지 이용휴는 ‘내 이름이 마모되지 않음은 네가 마멸되기 때문이다’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선비들은 귀한 벼루를 얻기 위해 천만금도 마다하지 않는 이도 있었고 죽으면 벼루도 함께 묻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벼루는 둥글거나 네모진 돌의 가운데를 파서 먹을 갈 수 있도록 하고 그 한쪽을 조금 깊게 파 먹물이 모일 수 있게 하는 간단한 구조다. 각 부분에 나름대로 이름이 있어 먹을 가는 부분을 연당(硯堂), 또는 묵도(墨道)라 하고 먹물이 모이도록 된 오목한 곳을 연지(硯池), 또는 묵지(墨池), 연홍(硯泓), 연해(硯海)라고도 했다.
벼루는 필기도구이니 당연히 구비해야 할 첫째 조건으로는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야 한다. 연당 표면에는 꺼끌꺼끌한 미세한 봉망(鋒芒)이 있어 여기에 물을 붓고 먹을 마찰시킴으로써 먹물이 생긴다. 따라서 봉망의 강도가 알맞아야 한다.
그러나 풍류를 즐기는 우리 옛 선인들이 그냥 실용적으로만 벼루를 만들 리는 없다. 파지 않은 부분이나 둘레에 각종 아름다운 조각을 넣어 한껏 멋을 내고 뒷면에는 명문장가와 명필이 모여 연명을 새겨 넣고 벼루 자체에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벼루는 또 돌 자체가 가진 무늬를 감상하며 즐거워하였다고 한다. 최고급품으로 치는 중국 광둥성에서 나는 단계연(端溪硯)은 ‘돌에 눈이 있는 것이 가장 고급으로 이를 구관조의 눈이라 불렀는데 돌의 무늬가 아름답고 나무처럼 결이 있어 모르는 이는 돌이 병들었다 했다’는 글도 남아있을 정도다. 어떤 호사가들은 벼루가 갖춰야 할 8덕으로 온(溫) 윤(潤) 유(柔) 눈(嫩) 세(細) 니(月貳) 결(潔) 미(美)를 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