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당국에 의해 ‘사망동향’이 파악된 김성애 전 여맹위원장.
김성애는 1924년 12월 29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좋은 집안은 아니었다. 농사를 짓던 평범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김성애는 어린 시절 총명했다. 여자라면 무학이 당연했던 그 시절 김성애는 사범학교에서 수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졸업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중등교육을 받은 김성애는 꽃다운 스물 셋 나이에 인민군 입대를 결정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 1947년의 일이다. 그가 처음 받은 보직은 ‘통신병’이었다. 물론 그가 군에 입대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여자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군에 입대한 김성애는 최고사령부의 무전수로 근무했다. 그의 능력은 모두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특출 났다. 특히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김일성의 당시 부인이었던 김정숙이었다. 물론 김정숙은 김성애가 훗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김성애는 능력을 인정받아 김일성의 지근거리인 관저 교환수로 발탁됐다. 훗날 남편이 되는 김일성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가게 된 셈이었다.
1949년 9월, 공교롭게도 김성애를 발탁했던 김정숙이 급사했다. 난산 탓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여섯 살이었고, 김경희는 불과 세 살의 어린아이였다.
이즈음 김성애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위기의 연속이었다. 참전 장교였던 이기봉 씨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성애는 전쟁 초창기 두 차례나 한국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하지만 그는 꾀가 있었고, 정신력도 강했다. 그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김성애는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 특히 두 번째로 생포됐을 때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용케도 소변을 보는 틈을 타 달아날 수 있었다.
위기 뒤 기회라고 했던가. 김성애는 세상을 떠난 김정숙을 대신해 자연스레 관저의 살림을 맡게 됐다. 당시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은 북한 홍명희 부수상(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유명)의 딸인 홍기연을 김일성의 아내로 염두에 뒀다는 후문이다. 실제 홍기연 역시 김성애와 함께 김정일-경희 남매의 육아에 관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선택은 김성애였다. 무엇보다 홍명희 부수상 스스로 자기 딸이 그 험난하고 어려운 자리에 가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김성애의 훗날을 견주어 본다면, 홍명희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김성애의 친아들 김평일 일가의 모습. 연합뉴스
김일성 주석은 지리멸렬한 전쟁 속에서 자신의 아이들과 살림을 봐주는 김성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됐다. 둘은 결국 아이를 갖게 된다. 휴전 직후 태어난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었다. 김성애는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였던 박정애 당 중앙위원에게 임신사실을 고백했고, 두 사람은 논의 끝에 서로를 배필로 받아들인다.
김성애는 1957년 공식적으로 김일성과 결혼하며 명실상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이때부터 김성애의 마음에는 ‘욕심’이 싹트게 된다. 어쩌면 이 위험한 ‘욕심’이 그를 나락으로 빠트렸을지도 모른다. 김성애의 친자 김평일이 ‘욕심’의 근원이었다.
어려서부터 김평일은 김일성의 외모를 빼닮았다. 게다가 학창시절 아버지를 닮은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친구들을 이끌었고, 학업성적도 좋았다. 당시 황장엽 당비서를 비롯해 많은 원로인사들은 ‘후계자감’으로 곁가지라는 점을 제외하곤 김평일을 더 높게 평가했다. 김일성 스스로도 ‘당은 정일, 군은 평일’이라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고 한다.
김성애는 애초 정일-경희 남매에게 헌신을 다한 가정교사였기에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친자이자 곁가지인 김평일이 태어나고 성장함에 따라 자연스레 이들 남매와 사이가 멀어졌다.
1960년 이후 김일성의 후계자 논의가 권부 내에서 시작됨에 따라 김성애는 운명을 건 도박에 나선다. 바로 친자 김평일의 후계자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김성애는 스스로 공식무대에 나서는 한편, 친정 식구들과 측근들을 권부 곳곳에 배치하며 ‘정치’에 관여했다. 특히 김성애의 남동생 성갑, 성호는 당 중책에 올랐다.
또한 김성애는 1969년, 20만 근로여성을 조직원으로 두고 있는 북한 최대 여성조직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의 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이 소식은 당시 ‘노동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될 정도였다. 인민 사이에서 국모의 위세를 대대적으로 세운 셈이었다.
김성애는 김일성의 전 부인인 김정숙과 관련한 교육 자료와 기념물들을 제거해 나갔고, 그 측근들 역시 좌천으로 내몰았다.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화 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다. 물론 이를 지켜본 정일-경희 남매는 맘속 깊이 김성애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 나갔다.
1994년 미국 카터 전 대통령 일가와 함께한 김일성-김성애 부부의 모습.
김성애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남편 김일성도 1971년 전국농업대회에서 ‘김성애의 얘기는 내 얘기’라고 할 만큼 애처가 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게다가 당 안팎에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혹은 ‘당중앙’으로 불렸던 김정일을 두고 김성애는 거리낌 없이 ‘정일’로 칭했다.
1970년을 전후해 김평일을 위시한 김성애와 김정일 간 경쟁과 갈등은 극을 치달았다. 성혜랑(김정일의 전 부인 성혜림의 친언니)의 수기에 따르면, 김성애는 김정일의 아킬레스건인 혼외자식 ‘김정남의 존재’를 끝없이 건드렸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김정일 역시 김성애를 비롯한 친족들과 이복동생이자 경쟁자였던 김평일의 비위 사실들을 수집했다.
1973년 터진 인민대학습당 사저신축 사건은 권력의 정점에 섰던 김성애를 한 순간에 몰락 시킨다. 당시 빨치산 세력들 사이에서도 당 위에 군림하는 김성애의 전횡에 피로감을 호소하던 차였다.
당시 평양 중심부인 김일성광장 주석단 뒤에 부지가 있었다. 김일성은 그곳을 애초부터 ‘인민대학습당(남한의 국립중앙도서관 격)’ 부지로 염두에 뒀고 평양시당에도 이를 알렸다. 그런데 어느 날 김일성이 그곳을 시찰했는데, 이전에는 없었던 웅장한 저택이 신축된 것을 보게 된다. 알고 보니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이 모친을 모시고 살던 집이었다. 김일성의 교시에도 불구하고 평양시당은 김성애의 위세에 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부지를 내줬던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당 차원에서 김성애와 그 측근들에 대한 각종 비위와 범죄 사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김성애는 1974년 6월 평양시당 대회를 기점으로 권부에서 멀어졌고, 1994년 미국 카터 전 대통령과의 회담 이후 지금까지 종적을 감췄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그토록 후계자가 되길 바라던 친아들 평일이 유고 대사를 시작으로 사실상 북한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두 모자는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NK지식인연대의 2014년 보도와 올 초 기자와 접촉한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김성애는 강계에 위치한 ‘100호 특각’ 등 외부에 머물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한때 북한을 주무르던 실권자였지만, 그 몰락의 속도는 대단히 빨랐던 셈이다.
한편 최근 우리 정보 당국이 그의 ‘사망 동향’을 확실시함에 따라 김성애는 공식적으로 망자로 취급될 전망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역사 속 독재자들의 ‘후처 잔혹사’...장칭도 에비타도 불행했다
장칭(좌)과 에바 페론(우)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독재자의 후처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궤적의 ‘잔혹사’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가난’, ‘독재자와의 우연한 만남’, ‘권력의 정점’ 그리고 ‘참혹한 몰락’으로 이어진다. 김성애 역시 이 궤적을 놀랍게도 그대로 따라갔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 ‘장칭(江青․1914~1991)’이다. 김성애가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다면, 장칭은 가난한 목수의 딸이었다. 그것도 후처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장칭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그 어두운 경험은 훗날 반인륜적이고 왜곡된 사고관의 씨앗이 된다. 장칭은 우연히 대학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횡횡하던 공산주의를 어깨너머로 알게 된다. 그것이 장칭의 운명을 바꾼다. 공산당에 입당한 장칭은 상하이에서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지하에선 공산주의 활동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학교에 강사로 나선 마오쩌둥을 만나고, 두 사람은 빠르게 사랑에 빠진다. 마오는 이미 세 번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지만, 이혼까지 감행하며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칭을 네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이미 이때부터 장칭의 싹을 본 동료들은 마오에게 ‘장칭이 정치무대에 나서지 못하게 하라’며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그 뒤 장칭은 남편 마오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사의 가장 극악하고 악독한 ‘영부인’으로 등극한다. 그는 정치 전면에 나선 이후 현대 중국의 대량 아사 사태를 도모한 ‘문화대혁명’의 중심에 서며 사실상의 ‘학살’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의 몰락도 앞서 김성애처럼 순식간이었다. 마오가 죽자 장칭은 체포된다. 본인 스스로는 마오의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인민들에게 장칭은 원수일 뿐이었다. 장칭은 결국 수감 생황을 이어가다 몇 차례 자살 시도 끝에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다. 태평양 건너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애칭 에비타·1919~1952)은 사후에 고난을 당한 케이스다. 에바 페론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가난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에바는 우연히 지진 피해자 모금활동 현장에서 후안 페론과 만나게 된다. 대선주자였던 후안 페론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독신자였고, 에바 페론은 그의 후처가 된다. 에바 페론은 열성적인 구제활동으로 민중의 돈독한 신뢰를 얻었고 ‘신화’로 추앙 받았다. 결국 후안 페론은 후처 에바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된다. 에바는 그의 남편이 재선때 부통령 후보로 오르며 정치적인 야욕을 드러내지만 군부의 견제로 실현하지 못했고, 1952년 자궁암으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후에서야 드러난 사실이지만, 에바 페론은 의회정치를 불신하고 사실상 포퓰리즘을 통한 독재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바 페론은 지병으로 사망해 ‘신화’로 남았지만, 훗날 미라로 처리된 그의 시신은 군부에 의해 빼돌려지고 훼손 되는 등 고난을 겪게 된다. 더 재밌는 것은 그는 스스로 야욕을 채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남편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 페론이 후안 페론에 이어 세계 최초의 여성대통령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저승의 에바 입장에선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셈이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