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알고 계시니?”
김광호는 여학생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오빠에게 먼저 물어보고 부모님에게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여학생이 생글거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여학생은 자신이 임신을 한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학교는?”
“학교에서 알 필요가 있나요? 그런데 오빠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김광호는 여학생의 당돌한 질문에 놀랐다. 이게 긴장할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 긴장할 일이라는 말인가. 대체 이놈의 계집애가 제 정신이라는 말인가. 울고불고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럼 이 일이 긴장하지 않고 웃을 일이냐?”
“축복받을 일이죠.”
“너 이름이 어떻게 되지?”
“수향이에요. 수향… 아직 내 이름도 모르고 있었나봐.”
수향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여학생이 임신을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임신을 하고 싶어 했어요?”
수향이 김광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김광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수향의 눈이 의외로 가슴이 울릴 정도로 예뻤다.
“그런 말은 아니잖아?”
“배고파요. 맛있는 것부터 사주세요.”
수향이 뽀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광호는 수향을 달래려면 저녁부터 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수향의 기분을 거슬려서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커피숍 밖으로 나오자 수향이 냉큼 팔짱을 끼었다. 명동은 젊은이들로 넘치고 있었다. 상큼 발랄한 젊은이들이 팔짱을 끼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가고 있었다. 김광호는 교복을 입고 있는 수향을 데리고 명동거리를 걷다가 칼국수집으로 들어갔다. 수향은 임신을 했기 때문인지 만두 한 접시와 칼국수 한 그릇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김광호는 칼국수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오락가락했으나 어떻게 매듭을 풀어 나가야 할지 난감했다.
“오빠, 나 따라와요.”
칼국수를 먹고 나오자 수향이 김광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팔꿈치가 수향의 부드러운 가슴을 찔렀다.
“어디 가는데.”
“명동성당.”
“명동성당엔 왜? 데모할 일이 있어?”
“그럼 고등학생 데리고 술집에 갈 거예요?”
수향이 김광호의 가슴을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되물었다. 수향은 생각하는 것도 당돌했다. 평일이기 때문인지 명동성당은 고즈넉했다. 김광호는 수향과 함께 벤치에 앉았다. 붉은 벽돌건물을 바라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오빠, 나랑 결혼할래?”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수향이 뜬금없이 물었다.
“갑자기 무슨 결혼이니?”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녔어. 천주교에서는 낙태를 금지해.”
“너는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결혼해?”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거 아니야. 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아기를 낳지 않으니까 괜찮아. 예정일이 내년 5월이야.”
“그렇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오빠만 좋다면 결혼하고 아기를 낳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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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결혼하자.”
김광호는 수향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역시 내가 한눈에 반한 오빠야.”
수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김광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도 네가 예뻤어.”
김광호는 수향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이 일을 부모님들이 알면 뇌진탕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빠, 그런데 결혼이 뭔지 알아?”
“결혼이야 둘이서 만나서 사는 거지 뭐.”
“호호호. 결혼은 구속이야. 오빠가 나에게 구속되는 거야.”
수향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에게 구속되는 것은 괜찮아.”
김광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거 끼어.”
“이게 뭔데?”
“구리반지야.”
수향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이 가방에서 구리반지를 꺼내서 김광호의 손가락에 끼워줬다. 수향은 당돌했을 뿐 아니라 어이없는 짓도 자주 저질렀다. 다음 주에는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뿐 아니라 김광호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향이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향이 모르게 김광호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면서 이 죽일 놈아, 어쩌자고 고등학생을 건드렸어. 이걸 낳고 내가 미역국을 먹었나? 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수향은 눈치도 없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서 애교를 떨었다.
“애가 어떻게 애교덩어리인지 딸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네. 이제는 광호 없이는 살아도 수향이 없이는 못 살겠다.”
수향이 돌아가자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공연히 남의 귀한 집 딸 버려놓지 마라.”
아버지도 근엄한 표정으로 김광호를 윽박질렀다. 김광호는 머리만 긁었다.
“너희들 약혼식해라.”
수향이 집에 찾아온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느닷없이 말했다.
“야, 약혼식이오?”
김광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수향이 부모님을 만났다. 못난 놈 같으니 그새 일을 저질렀냐? 임신을 했다니 약혼식이라도 해야지 수향이 부모님 안심을 하겠단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고 코를 꿴 기분이었으나 유구무언이었다. 김광호는 그렇게 해서 아직도 고등학생인 수향과 비밀 약혼식을 올렸다.
“김광호.”
약혼식이 끝나자 수향이 생글거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너 오빠 이름을 함부로 불러?”
김광호는 눈을 부릅뜨고 수향을 쏘아보았다.
“오빠는 이제 내 남자인데 뭐가 어때?”
“좋다. 내가 양보한다. 용건이 뭐냐?”
“공부 좀 해라. 내년에 애 아빠가 될 텐데 맨날 비디오만 때리냐?”
김광호는 수향의 말에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옳은 말이었다. 김광호는 그때부터 죽어라 하고 공부를 했고 수향은 임신한 상태에서도 수능시험을 보았다. 졸업할 때까지 임신 5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하느님이 돌보심인지 김광호와 수향은 나란히 대학교에 합격했다.
“아들놈과 며느리가 대학교에 합격했으니 기분은 두 배로 좋은데 선물값도 두 배로 들어가는구나.”
아버지가 너스레를 떨었을 때 온 가족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 이제 광호 오빠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수향이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말했다.
“데리고 가다니 어딜 데리고 간다는 말이냐?”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수향을 쳐다보았다.
“결혼을 하면 아버님이 평생 저를 데리고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상실감이 클 거예요.”
“설마 데릴사위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요. 결혼하기 전까지만 우리 집에서 살게 해주세요. 엄마가 맨날 울면서 지내요.”
수향의 호소에 아버지 어머니는 김광호만 노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은 못난 놈, 미역값이 오르는 이유를 알겠다, 하는 것이어서 김광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