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안민속마을. | ||
초가집이란 그 지붕을 볏짚이나 밀짚 혹은 억센 줄기를 가진 풀을 사용하여 덮은 집이다. 농촌에서는 흔히 구할 수 있는 볏짚으로 지붕을 인 것이 많지만 갈대나 새를 엮어 인 새나리지붕도 산간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있다.
초가집의 역사는 집이 생겼을 때부터 시작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 밑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사람들이 집이라는 것을 짓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였다. 이때부터 집터를 잡고 필요한 자재를 모아 집을 지었는데 유적 등을 보면 대부분이 땅을 파 움집이나 반움집을 만들고 이 위에 주변에 흔한 억새나 풀 등으로 지붕을 덮어 만들었다.
초가집은 돌집이나 흙집이 대부분인 외국에서도 간간히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오랜 옛날부터 아주 최근까지 서민들이 살던 가장 일반적인 주거형태였다. 신라 전성기 때 경주에서는 초가집을 볼 수 없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당시에도 경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가집이 일반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조선시대도 양반이나 부자는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에서 살았지만 대부분의 민초는 초가집에서 살았다. 1900년대 초의 사진을 보면 서울 한복판에도 초가집이 많이 눈에 띈다.
초가집은 나무, 짚, 진흙 등이 주재료이며 구조는 대체로 모임지붕 형식(추녀마루가 경사지어 올라가 용마루에서 모이게 된 지붕 형식)이다.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에서 처마 끝까지 서까래를 건너지르고 이것을 골조로 여기에다 잡목이나 대나무 발을 엮어서 새끼로 묶고 그 위에 흙을 물에 개어 얹고 고른다. 그위에 볏짚을 엮어서 만든 이엉을 밑에서부터 인다. 처음에는 뿌리 쪽이 밑으로 가게끔 돌리고 그 위에 이삭 쪽이 밑으로 가게 차례로 이며 용마루에는 볏짚을 틀어 지네처럼 엮어 만든 용마름(초가의 지붕마루에 덮는 ‘ㅅ’ 자형으로 엮은 이엉)을 덮고 그 위를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새끼로 얽어맨다.
▲ 초가집 지붕위의 박넝쿨은 고향 어머니의 품처럼 언제나 푸근함을 느끼게 한다. | ||
또 바람이 심한 데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 해 새끼를 그물처럼 엮어서 덮는다. 충청도에서는 가로로 길게 매는 것을 ‘장매’, 세로로 짧게 매는 것을 ‘가르매’라고 하며 서까래 끝이 썩지 않도록 이엉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지스레미’라고 한다.
초가지붕은 대체로 모임지붕의 형태를 이루나 겹집(여러 채가 겹으로 되거나 잇달린 집)인 경우 이른바 ‘까치구멍’이라는 것을 냈다. 용마루를 짧게 하고 좌우 양끝의 짚을 안으로 우겨넣어 만든 까치가 드나들 만한 구멍이다. 이 구멍으로 집안에 햇볕이 들어오고 연기가 빠져 나가도록 한 것이다.
짚으로 만든 지붕은 가벼워서 기둥에 거의 압력을 주지 않으며 비가 오거나 눈이 녹아도 짚의 결을 따라 흘러내려 잘 새지 않는다. 또 지붕 위에 얹힌 볏짚은 단열재 역할을 한다. 양철지붕이나 돌지붕보다 초가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도 짚의 단열재 역할 때문이다.
게다가 진흙으로 된 두꺼운 벽도 초가집의 중요한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흙을 갤 때 짚을 넣거나 수수깡, 대나무를 심재로 넣어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데, 두터운 벽은 낮에 비추는 태양열을 흠뻑 받아들여 차가운 저녁에 실내로 열을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초가집은 또 한지를 사용한 창호지 문과 흙벽이 습도를 조절해 준다.
그러나 마른 볏짚으로 만들다보니 화재에 약하고 지붕을 자주 갈아주지 않으면 위생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현대적인 생활에는 맞지 않는 면들이 많았던 초가집은 결국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점차 주변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추억 속의 고향집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