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철 KAIST 총장. 연합뉴스
국제적 학술지 ‘네이처’는 12월 13일 “한국 과학자들이 신성철 KAIST 총장에 대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 방식을 비판하고, 신 총장에 대한 의혹 제기에 그를 퇴진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학계를 뜨겁게 달군 이른바 ‘신성철 사태’가 국제적 이슈로까지 떠오른 것이다. 네이처가 국내 과학계 소식을 전한 것은 2005년 ‘황우석 사태’ 이후 13년 만이다.
신 총장 문제는 지난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던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가 전임 총장이던 신 총장 비위 혐의를 포착했다고 알려지면서다. 과기부는 11월 28일 신 총장을 업무상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고발했고, 11월 30일엔 KAIST 이사회에 직무정지 요청을 했다. 과기부는 신 총장이 DGIST 총장 재직 시절 국가로부터 받은 연구비 중 일부를 부당하게 썼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과기부 조치에 과학계는 발끈했다. 당사자인 신 총장은 12월 4일 기자회견을 열어 혐의에 대해 반박하며 “그간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했다. KAIST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과학자들은 과기부 직무정지 요청에 항의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800명이 넘는 교수들이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KAIST 총동문회는 성명서를 통해 “과기부는 KAIST가 막중한 국가 경쟁력의 산실임을 고려해 총장 직무 추진을 중단하고 신중히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KAIST 한 교수는 “신 총장이 실정법을 어겼는지 여부는 검찰에서 가려질 일이라고 본다. 죄가 있으면 그때 가서 그만두든가 하면 되는 것 아니냐. 과기부가 신 총장에게 제대로 된 해명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으로 들었다. 신 총장을 내치려고 하는데 혈안이 된 것 같다”고 꼬집었다. 과학기술인단체인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도 “검찰 고발을 철회하고 정당하고 당사자의 소명이 포함된 감사를 다시 진행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12월 14일 열린 KAIST 이사회는 이러한 기류를 반영한 듯 신 총장 직무정지에 대해 ‘유보’ 결정을 내렸다. 정부 측 요청을 사실상 거절한 셈이다. 국립대학인 KAIST가 그동안 과기부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면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이사회에선 정부 측 이사들(3명)은 표결을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나머지 이사들(6명)이 유보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서울 소재 대학의 한 이공계 교수는 “사립대학도 연구비 지원이라는 칼자루를 쥔 과기부 앞에선 절대 ‘을’이 된다”면서 “그런데 연구비를 비롯해 예산의 절반가량을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KAIST에서 그런 결정이 나온 것은 항명에 가깝다. 그만큼 과학계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의 KAIST 교수도 “솔직히 우리도 이사회가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정부가 최고 지성들이 모인 학교의 총장을 죄인 취급하며 쫓아내려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했다.
과기부는 KAIST 이사회 결정에 불쾌해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이사회 회의 직후 과기부 측은 “이사회 결정을 존중한다”면서도 “신 총장이 이번 사안의 본질을 왜곡하고 국제문제로 비화시킨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이 같은 행동을 자제하기 바란다. 교육자로서 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고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완곡하지만 신 총장, 그리고 KAIST 이사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KAIST 안팎에선 과기부의 밀어붙이기 식 감사에 다른 배경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난 정권에서 임명된 신 총장을 찍어내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신 총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은 초등학교를 나와 임명 당시 여러 뒷말이 나왔었다. 한 친문 의원은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부처 산하·유관 기관의 ‘친박’ 낙하산 문제를 거론하며 여러 인사들의 퇴출을 언급했는데 여기엔 신 총장도 포함돼 있었다.
KAIST의 또 다른 교수는 “신 총장이 선출될 때 정치적 이유로 학내에서 일부 반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 총장은 30년 이상 KAIST에서 연구한 학자다. 정치권과는 거리가 멀다. 신 총장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친분이 없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설령 신 총장이 ‘친박’이라고 해도 임기가 아직 2년 이상 남았는데 이런 식으로 쫓아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과학계는 현 정권 들어 정부가 출연한 연구기관 및 과기부 유관기관 수장들이 줄줄이 교체됐던 사례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본다. 지난달 물러난 하재주 전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을 비롯해 10여 명이 물러났는데, 모두 지난 정권 때 임명됐지만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정부로부터 직·간접적인 사퇴 압박을 받아 그만둔 것으로 전해진다.
신 총장 역시 스스로 물러나지 않자 과기부 감사 및 검찰 수사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추측이 파다하다. 이와 관련해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한 과기부 관계자는 “신 총장과 같은 그런 문제는 우리 선에서 다룰 성격이 아니다. 정치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면 맞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KAIST 총장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이 과기부 윗선, 즉 청와대 등 여권 핵심부에 의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특히 KAIST 내부에선 신 총장 후임자가 이미 내정됐다는 말까지 들린다. 현 정권 성향으로 알려진 한 내부 인사가 차기 총장 후보로 거론되는데, 그는 친문 실세로 꼽히는 여권 의원과도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여권에서 KAIST와 과학계 여론을 긴장해하며 바라보는 이유다. 한 친문 의원은 “일단 검찰 수사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과학계 반발이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신 총장 교체를 강행하면 득보단 실이 많을 것 같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은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지금 과학자들이 든 촛불은 외면하고 있다. 낙하산 인사 때문이다. 친박 몰아내겠다고 친문 꽂아 넣는 게 적폐 청산이냐. 연구에 집중해야 할 과학자들이 왜 지금 정부를 성토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