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21일 오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경수 경남지사가 같은 날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일요신문] 그야말로 불편한 동행이었다.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항소심 공판과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재판이 열렸다. 한 명은 대권주자였고 한 명은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두 정치인이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층 311호(김경수)와 312호(안희정)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피고인석에 앉았다. 공판 시각은 각각 오전 10시와 10시 10분으로 불과 10분 차이였다.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지난해 7월 기소됐다. 오늘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는 모두진술 등만 공개됐다. 김 지사는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다. 오늘로 벌써 8차 공판이다.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는 여성단체. 사진=최희주 기자
21일 9시쯤 서울 법원의 출근길은 평소와 다른 인파로 북적거렸다. 검은색 양복에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사람들 속에서 낯선 무리가 발견됐다. 여성단체와 보수단체였다. 여성단체 회원 30여 명은 노란색 손팻말을 들고 있었고 보수단체 회원 16명은 군청색 외투와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군청색 외투에는 ‘여투위 돌격대’라고 쓰여 있었다.
두 무리는 정문에서 갈라섰다. 보수단체는 곧장 법원으로 향했고 여성단체 회원들 30여 명은 법원 정문 앞에 멈춰 섰다. 검은색 천가방을 손에 든 여성단체 회원은 하나둘 속속 모여드는 참가자들에게 노란색 손팻말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들은 ‘위력 성폭력 인정하라’, ‘안희정을 신문하라’, ‘피해자다운 피해자는 없습니다’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등의 손팻말을 들고 30분간 침묵 시위를 벌였다.
9시 30분쯤, 빨간 깃발을 든 경찰들이 대열을 맞춰 법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법원 2층. 안 전 지사와 김 지사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 출입구 앞 복도였다. 앞서 군청색 외투를 입고 있던 보수단체 회원들도 이곳에 있었다. 경찰들이 법원 복도를 몸으로 막아서자 여기저기서 “너희가 뭔데 막아서냐. 김경수를 구속하라!”는 비난이 날아왔다. 사복을 입은 경찰은 “소란피우지 말라”며 제지하자 보수단체 회원은 “어디서 반말이냐”고 응수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등장하자 여성 단체 회원들이 “안희정 유죄”라고 외치고 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안 전 지사의 항소심 공판은 오전 10시 10분쯤, 김 지사의 재판은 그보다 10분 앞선 10시쯤 열릴 예정이었다. 오전 9시 40분이 되자 보수단체 회원 한 명이 “이제 슬슬 시작하자”며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자신이 “김경수를” 하고 선창하면 “구속하라”고 외치라고 지시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 있던 여성단체 회원들에게 “안희정도 구속돼야지! 우리 합심하자”며 “이따가 ‘안희정을 구속하라’ 외쳐 줄 테니 ‘김경수를 구속하라’도 같이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먼저 등장한 건 김 지사였다. 9시 45분쯤 김 파란색 넥타이를 맨 김 지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보수단체 회원들은 “백의종군을 하려면 도지사를 내려놓고 하라”고 소리쳤다. 그로부터 15분 뒤인 10시쯤 안 전 지사가 등장했다. 안 전 지사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정장 차림새였다. 이번에는 여성 단체들이 “미투 강연은 왜 했냐”, “안희정은 유죄!”라고 외쳤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경찰 관계자 및 법조 관계자들과 법정 출입구로 향하고 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같은 피고인 신분이었지만 두 전‧현직 지사는 법정 입장부터 비난 세력을 대하는 태도까지 사뭇 달랐다. 김 지사는 포토라인에 서서 “진실을 밝히겠다”는 짧은 인터뷰를 한 뒤 법정 출입구로 향했다. 자신을 “구속하라”고 외치는 보수단체 앞에 짧은 시간 멈춰 서서 잠깐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반면 안 전 지사는 고개를 숙인 채 포토라인을 빠르게 지나쳤다. 취재진이 뛰어가 심정을 묻자 “죄송하다”, “드릴 말씀이 없다”며 시종일관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안 전 지사는 법정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동행한 사람들에도 차이가 있었다. 경찰 관계자를 제외하고도 법조계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 여러 명과 함께 법정으로 들어선 김 지사와 달리 안 전 지사 뒤에는 경찰 관계자로 추정되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날 두 사람은 15분 간격으로 같은 복도를 밟았다. 한 명은 한때 누구보다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였고 나머지 한 명은 현재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한 명은 정치인으로서 기반을 잃었고 나머지 한 명은 고군분투 중이다. 김 지사는 안 전 지사에 대한 심정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저도 제 재판 받기 바쁜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모습이었다.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