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봐요, 부총리. 당신이 우리 국회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최진길이 거만한 표정으로 김동철을 쏘아보았다. 종로2가에 있는 한식당의 아담한 별실이었다.
“의원님께서는 행정부에 압력을 넣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김동철은 최진길에게 잘라 말했다.
“압력? 부총리, 정말 이럴 거요?”
“은행장은 대통령께서 이미 낙점한 상태입니다.”
“대통령이 은행장 인사까지 간섭을 한다는 말이오? 이러지 마시오. 내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사람이오.”
“그러시다면 이번 인사는 절대로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당신 여자 문제도 복잡하던데 왜 이래?”
최진길이 표정을 바꾸어 김동철을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인사 문제를 가지고 로비를 하는 자가 여자 문제로 협박을 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그렇습니까? 공직에 있는 사람은 연애도 못 합니까?”
김동철은 얼굴이 붉어져 최진길에게 반박했다. 정치인이 되면 얼굴이 두꺼워진다고 하더니 최진길이 그 짝이었다. 남들은 운동을 해서 살을 뺀다는데 최진길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뚱뚱하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물러난 것도 몸이 너무 뚱뚱하여 대통령이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경제수석이 저렇게 뚱뚱하면 국민들은 대통령이 잘 먹고 잘 사는 줄 생각한단 말이야.’
대통령이 우스갯소리로 했다는 말이었다. 김동철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한바탕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흥! 남의 유부녀와 호텔에 드나드는 것이 연애인가?”
최진길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비웃었다.
“하하하. 최 의원님과는 더 이상 말씀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김동철은 최진길에게 물이라도 끼얹고 싶은 것을 눌러 참았다. 최진길과 먹은 점심이 올라올 것처럼 역겨웠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이런 인간과는 한시라도 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두고 봅시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김동철의 등을 향해 최진길이 차갑게 내뱉었다. 김동철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청을 통해 한식집 종업원들이 두 줄로 서서 인사를 하는 앞마당으로 나왔다. 부총리와 국회의원이 함께하는 식사자리였기 때문에 한식집 여주인까지 나와서 인사하고 있었다. 김동철은 그들의 인사도 받지 않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서둘러 걸어갔다.
‘김영택이 은행장 서열은 아니지.’
김동철은 차에 올라타자 시트에 등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기름기가 번지르한 김영택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역시 편치 않았다. 최진길이 펄펄 뛰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영택이 소개한 주애란을 아련하게 떠올리자 찬물 속에 한 줄기 햇살이 비치듯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김동철보다 스무 살이나 젊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팽팽한 둔부를 생각하자 가슴이 설레었다. 김동철은 주애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김동철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웬일이세요?”
윤기가 흐르는 주애란의 탄력 있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얼굴이 보고 싶어 전화를 했소. 시간이 어떻소?”
“오후 내내 강의가 있어요. 지금 학기 초잖아요? 시간이 안 되어서 어떻게 하죠?”
“괜찮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오.”
“호호호. 고마워요.”
“다음에 또 연락을 하겠소.”
“저는 오늘 노란 속옷을 입고 있어요. 제 몸을 애무해 주세요.”
‘노란 속옷이라면 그 위에도 노란 브래지어를 했겠지.’
그것은 김동철이 외국에 갔다가 사온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자신의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쇼핑을 할 수가 없다.
“사무실로 가세.”
김동철은 뒤를 돌아보는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 운전기사가 대꾸하지 않고 재경원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1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거리는 차량들로 가득했다.
‘기름값을 더 올리든가 해야지 좁은 나라에서 너도나도 차를 끌고 나오다니.’
김동철은 속으로 혀를 찼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주애란의 얼굴이 다시 아련하게 떠올라왔다. 김동철은 상상 속에서 노란 속옷 세트를 입고 있는 그녀의 알몸을 애무했다. 그녀를 사귄 지 벌써 세 달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그녀와 필드에서 골프를 치고, 두 번째는 점심식사를 하고, 세 번째는 호텔에 들어갔다. 주애란이 교수이고 유부녀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애란이 특별하게 뇌쇄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김동철은 주애란의 몸속에 깊이 들어갔을 때 전율하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연락도 하지 않고 어떻게 왔어?”
부총리 부속실에는 김영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행이 한창 바쁠 시간인데 전무라는 자가 로비나 하러 돌아다니다니. 김동철은 김영택이 탐탁지 않았다.
“부총리님께서 저 때문에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자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야.”
김동철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자신이 천거하는 자가 은행장에 임명되지 못하면 자신의 파워가 의심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김영택 카드를 관철시켜야만 추종자들이 그를 계속 따르게 되고 김동철 사단이 만들어진다.
“죄송합니다.”
“점심 때도 최진길 의원과 한바탕 했어.”
“그분은 민영석 부행장을 밀고 있지 않습니까?”
민영석은 한양은행의 부행장으로 김영택에게는 직속상관이다. 은행원 생활을 30년 넘게 했으니 은행장을 한번 하고 명예롭게 퇴직하겠다면서 전방위로 로비를 하고 있었다. 은행장이 되기 위해 뿌린 돈이 적지 않아 김영택과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사외이사 말이야.”
김동철은 부총리 집무실의 안락의자에 앉아서 김영택을 쳐다보았다.
“예. 말씀하시지요.”
“내가 지명하는 사람 셋을 임명해.”
“예.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김영택이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목적을 위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김영택이었다.
김영택을 한양은행 은행장에 임명하는 것은 김영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은행장을 시켜주는 대신 인사권을 어느 정도 그가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은행인사가 빨리 끝나야지 골치 아파 죽겠어.”
김동철은 생색을 내느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총리님, 밤에 시간 있으십니까?”
“밤에는 왜? 또 무슨 도깨비놀음 할 일 있어?”
“제가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선물? 생뚱맞게 무슨 소리야?”
“여행원입니다. 제가 교육을 잘 시켜서 뒤탈이 전혀 없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여간 착하지 않습니다.”
“김 전무, 김 전무가 무슨 뚜쟁이야? 그리고 내가 여자에 미친놈이야? 내 사회적 체면이나 직위도 생각해야지 왜 그런 짓을 해?”
“죄송합니다. 이번만은 제 의향을 따라 주십시오.”
김영택이 고개를 숙이자 김동철은 피식 웃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영택이 추진하는 일에는 뒤탈이 없다. 은행원이라면 20대일 것이고 20대라면 야들야들한 몸뚱이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름이 뭐야?”
“정희숙입니다.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구요. 통통하고 예쁜 아이입니다.”
김영택의 말에 김동철은 숨이 막혀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