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들이 최근 온라인 청원게시판을 신설, 운영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수원·인천·부산 청원게시판 모습.
서울시는 지난 9월 시민청원 게시판인 ‘민주주의 서울’을 개편, 시민들로부터 다양한 정책·의견을 제안 받고 있다. 시는 관련 부서를 통해 시민 50명이 공감한 제안에 대해 공식 답변을 내놓고 500개 이상의 공감을 얻은 제안은 ‘시민토론’ 주제로 선정, 온라인 찬반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토론참여 인원이 5000명이 넘는 제안에 대해선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식 답변을 내놓는다. 서울시 관계자는 “민주주의 서울은 2017년 10월에 오픈한 플랫폼으로 여러 가지 실험과 자료 수집 등을 거쳐 9월 새롭게 재단장했다”고 말했다.
성남시는 지난 10월 이와 비슷한 형태의 ‘행복소통청원’ 게시판을 신설했다. 성남시는 5000개 이상의 동의를 얻은 청원 글에 대해 시장이나 실·국장이 직접 답변을 내놓고 있다. 추후 특정 안건에 대해 토론·투표하는 기능도 추가할 예정이다. 은수미 성남시장은 “시민 청원제는 시민들의 새로운 소통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시민과 함께 만드는 시정을 이룩하는 데 첫 발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천과 부산도 12월 각각 ‘인천은 소통e가득’, ‘와글와글’ 시민청원 게시판을 만들었다. 두 게시판 모두 3000명 이상의 시민들로부터 동의를 얻은 청원 글에 한해, 시장이 직접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부산시 관계자는 “‘시민토론 온에어’(on air)란을 활용해 온라인 정책 토론도 진행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여수, 포항, 수원, 대구 등이 청원 게시판을 최근 신설·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도가 직접 나서서 운영하는 게시판도 있다. 지난 8월 전남도청이 ‘전남 도민청원’을 개설한 것. 수많은 지자체들이 ‘청와대 국민청원’을 본떠 온라인 청원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게시판엔 지자체가 직접 나서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청원 글이 적지 않게 올라오고 있다. 일례로 ‘인천은 소통e가득’ 게시판엔 ‘청라와 송도 국제도시 간 버스노선 신설’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다. 두 도시의 인구가 10만 명에 이르고 있지만 두 곳을 오가는 버스노선이 적어 불편이 크다는 것. 부산 시민청원 ‘와글와글’ 게시판엔 ‘과밀 학급 지역인 동래구 온천동에 신규 초등학교 설립이 필요하다’는 글이 올라와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울시 청원게시판의 ‘10년 이상 방치된 은평뉴타운 중심상업지역 일부를 광장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그중 하나다.
이들 청원은 모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선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지자체 청원게시판이 중앙 정부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공론화하고, 지방 정부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와대와 중앙정부의 역량이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자체 청원시스템은 이를 보완하고 실질적인 개선책을 이끌어낼 수 있다”며 “청원시스템은 과거 미국 오바마 정부가 직접 민주주의 요소로 도입한 것으로, 이것이 지자체 곳곳으로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움직임”이라고 설명했다.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청원게시판이 정치와 행정이 지닌 엄숙성을 줄이고 정부와 시민 간 소통을 늘리는 가교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최다 추천을 받은 청원 글 목록 캡쳐. 지자체 청원시스템이 중앙 정부의 한계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들 청원게시판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는 저조한 실정이다. 지난 10월 개설된 성남시 청원게시판에서 청원 진행 중인 글은 12월 26일 기준으로 110개가 채 되지 않으며, 이 가운데 5개의 글만이 10명이 넘는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나머지는 모두 10 이하의 지지수를 기록하고 있다. 수원시는 댓글이 200개 이상 달린 청원 글에 대해 관련 부서가 답변키로 밝혔지만,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청원 글의 댓글 수는 6개에 불과하다. 8월에 개설된 전남도청과 여수 청원게시판엔 올라온 청원 글은 각각 10개, 7개뿐이다.
일각에선 확산되는 지자체들의 청원게시판 운영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한다. 청원게시판이 지자체들의 현장 조사·감독 등을 소홀히 하고, 다수의 논리로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일부 게시판엔 기피시설 유치 반대나 재개발 추진 등 집단 이기주의적인 성격을 띤 청원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자칫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저해할 수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청원시스템에 대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앞서의 고강섭 책임연구원은 “시민들이 제안한 의견의 합리성을 판단, 공론화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청원시스템 운용에서 불거지는 문제점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며 “이 위원회는 시민과 정부관료, 전문가들로 함께 구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시는 공론의제선정단을 조직해 500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제안에 대한 공론화 여부와 타당성을 판단하고 있다. 김봉석 성균관대 사회학과 초빙교수는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의견을 개진하는 개개인들의 책임의식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재 지자체들은 청원게시판의 브랜드 명과 플랫폼 자체를 홍보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선 시민들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더군다나 농촌지역 거주민들은 이러한 온라인 시스템에 익숙지 않은 상황”이라며 “지역사회에서 이슈화되고 있거나 문제시되는 사안, 논의해볼 만한 사안 등을 앞세워 청원시스템을 홍보·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