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두건을 쓴 직공들과 보라색 두건을 쓴 감독관.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에 위치한 섬유공장에서 직공들이 옷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 만든 옷들은 유럽의 C&A, H&M 매장으로 보내진다. 사진=슈테른
[일요신문] 그야말로 ‘패스트패션’의 전성기다. ‘패스트패션’이란, 최신 유행에 따라 빠르게 제작 및 유통되는 의류를 말한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도 하나둘 상륙하기 시작한 글로벌 브랜드들은 그후 국내 패션 업계의 지도를 현격히 바꿔놓았다. ‘패스트패션’의 장점은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에 있다. 운만 좋다면 겨울 코트 한 벌도 4만~5만 원의 저렴한 가격에 ‘득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세일이라도 들어갈 경우에는 50% 할인된 가격에 구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격이 이렇게 싸다 보니 한철만 입고 버리는 옷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도 사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에 쉽게 사고, 또 쉽게 버리는 것이다.
이런 브랜드들은 어떻게 이렇게 저렴한 가격에 옷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한 걸까. 아무리 섬유 단가가 낮다고 해도, 또 유통망이 촘촘하다고 해도 그렇게 빠른 회전율과 생산율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렴한 가격의 비밀은 바로 저렴한 인건비에 있었다. 최근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캄보디아를 찾아가 그곳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와 근로 조건에 대해 보도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점차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패션 산업의 혁신에 대해서도 함께 보도했다.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기업이 모두 함께 웃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시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티셔츠, 블라우스, 청바지, 스웨터가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알고 있는가.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옷에 붙어있는 라벨을 확인하면 된다. 보통은 ‘메이드 인 차이나’ 혹은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혹은 ‘메이드 인 인디아’일 것이다. 이밖에 베트남, 파키스탄, 캄보디아 등도 흔하게 눈에 띈다.
사실 이 라벨에 숨어있는 고통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마도 이 옷을 만든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재봉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령 한벌에 39유로 90센트(약 5만 원)인 코트나 19유로 90센트(약 2만 5000원)인 여성용 원피스라니, 이런 가격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비극적인 실태는 지난 2013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고를 통해 전세계에 적나라하게 알려졌다. 당시 붕괴된 라나 플라자 섬유공장의 잔해 속에서는 먼지 투성이의 남녀 시신들이 대거 발견됐다. 당시 붕괴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1100명이 넘었고, 2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때문에 이 사건을 가리켜 ‘패션업계의 9·11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건 발생 후 C&A, H&M, 자라, 프라이마크 등 유럽의 패스트패션 매장에서는 점점 더 많은 고객들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가령 “당신 회사는 보다 공정한 생산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티셔츠나 바지의 가격을 단 몇 센트라도 올리지 않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공장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보다 잘 살 수 있도록 하지 않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이었다.
공장에 출퇴근할 때는 지문인식기로 시간을 기록한다. 직공들은 일주일에 6일, 8~10시간 씩 일한다. 사진=슈테른
시장조사기관인 GfK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비자들의 절반이 구매의 윤리와 도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들은 심지어 지속 가능하고 공정하게 생산된 옷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티셔츠 한 벌의 가격이 단돈 몇 센트가 더 비싸진다 해도 이런 소비자들은 그 정도의 가격 변화는 체감하지 못하고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 외곽에 있는 ‘세두노 그룹’의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들의 시간당 급여는 1달러(약 1100원)다. 이 정도는 최저임금이 월 170달러(약 19만 원)로 책정되어 있는 캄보디아에서도 박봉에 해당한다. 한 가정이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공장에서는 2000명가량의 어린 직공들이 재봉틀 앞에 앉아 일주일에 6일, 하루 8~10시간씩 일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옷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내 C&A나 H&M의 매장으로 보내진다. 매년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의류는 1800만 벌 정도다.
‘슈테른’과의 인터뷰에서 직공들은 이 공장은 그나마 근무 환경이 나쁜 편이 아니라고 말했다. 더 나쁜 환경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급여가 주당 5~10달러(약 5000~1만 원) 정도 더 오르면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루에 단돈 몇 달러씩만 더 받아도 직공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더 질 좋은 식품을 살 수 있고, 더 이상 10센트짜리 싸구려 수프로 연명하지 않아도 되며, 화물 트럭의 짐칸에 몸을 싣는 대신 출퇴근용 중고 스쿠터를 살 수도 있다(캄보디아에서는 출퇴근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매주 발생하고 있다). 아니면 자녀들의 교육비로 더 많은 돈을 저축할 수도 있다.
실제 캄보디아에서 티셔츠 한 장을 만드는 데 드는 인건비는 15~20센트(약 110~220원) 정도며, 이들의 임금을 올려도 유럽 매장에서 판매되는 바지, 스웨터, 셔츠 등의 가격은 고작 몇 센트 더 비싸질 뿐이라고 ‘슈테른’은 말했다.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거의 체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지금까지 패션 기업들은 이렇게 대답해왔다. “물품이 생산되는 공장은 우리 소유가 아니다” “우리가 임금을 책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최저임금을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더 솔직한 경우에는 “이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자수기계는 종종 오류를 발생한다. 때문에 일일이 육안으로 디테일을 확인해야 한다. 먼지 때문에 직공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일한다. 사진=슈테른
하지만 근래 들어 몇몇 기업들을 시작으로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라나 플라자 붕괴 사건으로 충격에 빠졌던 몇몇 패션 회사들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C&A, H&M, 자라, 프라이마크를 비롯해 타미 힐피거, 캘빈 클라인을 거느린 미국의 PVH 등 20개의 글로벌 패션 회사들이 함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이들은 이윤의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기꺼이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전환점의 중심에는 이들 기업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ACT단체가 있었다. ACT란 Action(행동), Collaboration(협력), Transformation(변화) 등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임금이 저렴한 나라와 공장에서 물품을 생산해오던 지금까지의 관행을 그만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대신 노동조합과 고용주가 함께 둘러앉아 임금을 협상하되, 정부는 한 발 물러나 있는 단체교섭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공장 직원들은 경영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하게 되며, 노동안전성을 보장받고, 건강보험료 또는 특정 작업에 대한 수당 등에 대해서도 투표권을 갖게 된다.
패션 기업들이 이처럼 자발적으로 ACT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가장 무서운 존재, 바로 고객들 때문이기도 하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소비자들의 압력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H&M이나 C&A는 온라인 사이트에 의류 생산 공장 목록을 공유하고 있으며, 심지어 H&M의 하위 브랜드인 아르켓에서는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티셔츠나 바지가 어떤 공장에서 생산되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니 더이상 “우리는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낡은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됐다.
패션 기업들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 이유는 또 있다. 바로 그룹들의 경영진들이 세대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C&A, H&M, 자라 등은 모두 가족 기업으로, 설립자의 자녀들이나 손주들은 노동자를 학대하거나 노동력을 착취하는 이미지로 대중에게 묘사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캄보디아 섬유공장의 한 관계자는 “설립자 가족들은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쉬는 시간에 창고에서 가족들과 통화하고 있는 직공. 대부분의 직공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주기적으로 돈을 송금한다. 사진=슈테른
ACT 단체의 조율을 맡고 있는 독일 출신의 프랑크 호퍼는 “우리의 콘셉트는 매우 새로운 것이며, 야심찬 것이다. 수백만 명의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이다”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첫 번째 시범 국가는 캄보디아였다. 만일 캄보디아에서 성공할 경우에는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 다른 나라에서도 확대 시행될 것이라고 호퍼는 말했다.
인구 1600만 명인 캄보디아의 주요 자원은 젊은 노동자들, 특히 저임금으로 기꺼이 일하고자 하는 여성 인력들이다. 이들 가운데 73만 명이 현재 560곳이 넘는 섬유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주요 수출 품목은 섬유이며, 전체 가운데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전세계에서 판매되고 있는 티셔츠 열 장당 한 장에는 반드시 ‘메이드 인 캄보디아’라는 라벨이 붙어있게 마련이다. 의류 생산량의 46%는 유럽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21%는 미국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 호주,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10년 전부터 스웨덴의 패션 기업인 H&M 인도 및 아시아 지부에서 일하고 있는 제니 파겔린은 최근 스톡홀름에 있는 본사로부터 명확한 지시, 즉 새로운 ACT시스템을 강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만일 그럼에도 공장주가 완고하다면,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장주들은 수백만 유로에 달하는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순순히 응하곤 한다. 이와 관련, ACT 모델을 개발한 국제노동조합산업의 부회장인 제니 홀드크로포트는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하든지, 아니면 다른 나라로 생산 설비를 옮기든지 할테니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한다”라고 귀띔했다.
캄보디아 내 560개 섬유공장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켄 루는 “생수 가격은 오르는데 옷 값은 떨어지고 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혁명적이다. 만약 잘만 시행된다면 섬유 산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기업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공장 측 역시 이를 대가로 확실한 보증을 원하고 있다. 가령 루는 H&M으로부터 높은 임금을 핑계로, 또는 더 싼 가격을 부르는 곳이 있다는 이유로 공장을 다른 나라로 이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또한 루는 “지금은 캄보디아의 공장들만 함께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베트남,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공장들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ACT에 동참할지 안 할지는 공장들이 자유롭게 결정할 것이다. 식탁 위에 물고기를 올려 놓았을 경우, 만일 맛이 있다면 먹을 것이고, 냄새가 난다면 그냥 둘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