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제1회 아시안컵 우승후 경무대(현재의 청와대)를 방문한 선수단. 사진=대한축구협회
[일요신문] 아시아 축구의 최강자를 가리는 2019 아시안컵이 다가오고 있다. 1960년 우승 이후 59년째 무관에 그치고 있는 한국 축구로서는 한맺힌 대회이기도 하다. 와신상담 우승을 노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대 아시안컵 참가 역사를 대회별로 2회에 걸쳐 소개한다.
# 1956 홍콩 대회 - 첫 챔피언에 오르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자신들의 첫 공식 대회로 창설했다. 초창기 월드컵이 그랬듯이 아시안컵도 초기에는 규모가 미미했다. 8개국만이 예선에 참가해 한국, 이스라엘, 남베트남이 본선에 진출하고, 개최국 홍콩까지 4팀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렸다.
한국은 1차전에서 홍콩과 비겼지만, 이스라엘과 남베트남을 잇따라 꺾고 첫 번째 트로피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한국 참가 선수 중에는 박경호 원로(88세)만이 생존해 있다.
귀국후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한 선수단은 국제대회를 할수 있는 잔디운동장 건립을 요청했다. 정부에서 이를 받아들여 지금의 효창운동장이 만들어졌다.
1960년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안컵에서 한국팀의 경기 모습. 사진=대한축구협회
제2회 대회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한국을 제외한 10개국이 예선에 참가해 이스라엘, 대만, 남베트남이 본선 티켓을 얻었다. 한국은 팬들의 열띤 응원을 등에 업고 3전 전승으로 대회 2연패를 차지했다. 스트라이커 조윤옥은 4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질서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관중이 운동장에 들어찼고, 효창운동장 인근의 산비탈까지 팬들이 올라가 경기를 관전했다고 한다. 60년 가까이 지난데다, TV 중계는커녕 라디오 중계도 없던 때라 당시 우승의 감격을 경험했던 우리 국민은 현재 70대 이상의 노년층 일부 밖에 없을 것이다.
# 1964년 이스라엘 대회 - 올림픽 때문에 대표2진이 참가
한국은 직전 대회 우승국 자격으로 자동진출했다. 그러나 핵심 멤버들이 빠진 대표2진이 출전했다. 황당하게도 같은 시기에 도쿄 올림픽 아시아 예선이 열렸는데, 당시 분위기상 올림픽 진출이 더 중요했기에 대표1진을 올림픽 예선에 보냈기 때문이다. 중동 원정이 처음이었던 선수들은 무더위와 음식 등 모든 것이 낯설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홍콩을 눌렀지만 이스라엘과 인도에 패해 1승2패로 3위에 그치고 말았다. 홈팀 이스라엘이 우승했다.
# 1968년 이란 대회 - 본선 참가 실패의 치욕
본선 참가팀이 5개국으로 늘었지만 한국은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대만에서 열린 예선에서 일본과 대만에 패해 처음으로 본선 참가가 좌절되는 치욕을 맛보았다. 홈팀 이란이 우승함으로써, 3대회 연속 개최국이 챔피언에 올랐다.
# 1972년 태국 대회 - 차범근 데뷔, 아쉬운 준우승
이세연, 김호, 이회택 등 1970년대 초반 대표팀의 에이스들이 총 출동했다. 대학 1년생 차범근도 이 대회를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한국팀 경기가 라디오로 처음 중계되기 시작했다. 본선 참가국이 6개팀으로 늘어 2개조로 나눠 조별리그를 치렀다.
# 1976년 이란 대회 - 세대교체 진통속에 예선 탈락
15개국이 예선에 참가하고 6팀이 본선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은 예선전에서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의 부진으로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했는데, 허정무, 이영무, 조영증 등 새로 발탁된 어린 선수들의 국제경험이 부족했던 것이 이유였다. 이란이 또다시 우승, 대회 3연패를 달성함으로써 아시아 최강자임을 입증했다.
1980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 북한과의 대결에서 정해원(16번 선수)이 헤더골을 성공시키는 모습. 사진=대한축구협회
본선 참가팀이 10개로 늘어났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경기가 TV 생중계돼 안방에 전해졌다. 한국은 조별리그를 순항한뒤 준결승에서 난적 북한을 만났다. 후반 막판 정해원이 잇따라 두골을 득점, 극적인 2-1 역전승을 따냈다. 그러나 북한과의 대결에 힘을 너무 쏟은 탓에 결승에선 쿠웨이트에 0-3으로 맥없이 무너졌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살의 신예 최순호는 7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오르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대표팀은 귀국후 공항에서 서울 도심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준우승을 하고서 카퍼레이드를 벌인 것은 대표팀 역사상 전무후무했다. 오로지 북한을 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 1984년 싱가포르 대회 - 조별리그 최하위 탈락 수모
2회 대회 우승 당시 주장을 맡았던 문정식이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했다. 12월에 대회가 열려 힘겨운 프로 시즌을 마치고 참가한 한국 선수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우디, 쿠웨이트와 겨우 비겼으나 시리아, 카타르에 잇따라 패해 2무2패, 조 최하위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4경기에서 득점도 고작 1골에 불과했다. 팬들의 비난이 빗발치면서 1983 멕시코 청소년대회 4강을 이룬 박종환을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하라는 여론이 거세졌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