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국사의 석가탑(국보 21호·앞)과 다보탑(국보 20호).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그러나 우리나라의 탑은 고대로부터 불교와의 관련을 넘어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의 관념적 구조에 중요한 위치를 점해 왔다. 개인적인 믿음과 의지의 상징물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성황당 적석탑처럼 동구나 고갯마루에 돌을 쌓아 병액을 쫓고 행운을 불러들이기 위한 샤머니즘적인 것도 있었으며,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세의 결함을 보충하는 데도 탑을 세우는가 하면 황룡사 구층탑처럼 호국사상과도 밀접한 맥락을 갖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탑은 조형미가 뛰어나 그 자체로서도 훌륭한 미술품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탑이 전래된 것은 불교와 시기를 같이 한다. 처음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다층목탑이 만들어 졌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랜 역사를 지나며 화재 등으로 소실돼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신라에서는 벽돌을 찍어 만든 전탑이나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모전탑도 있었지만 점차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서 나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탑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탑으로 정형화됐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300여 개의 석탑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그중에서도 우선 백제 시대의 것으로 석탑의 시조격인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9호)이 눈길을 끌고, 신라의 것으로는 전탑의 구조를 모방한 분황사석탑이 탑의 변천사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감은사지 3층 석탑(국보 112호), 고선사지 3층 석탑(국보 38호)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 백제의 목탑구조와 신라의 전탑구조를 결합시켜 한국 고유의 석탑 전형을 확립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는다.
탑의 전성기는 통일신라 중기에 접어드는 8세기 이후다. 이때부터 석탑 표면에 여러 가지 불교상을 조각하여 장엄하게 만드는 일이 시작됐다. 이 때부터 일반형 석탑과 다른 양식의 이형석탑이 출현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국보 35호)과 불국사 다보탑 등이다.
▲ 월정사 8각 9층석탑(국보 48호) | ||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불국사의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국보 21호)일 것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탑을 세운 시기는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석가탑은 원래 이름이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무영탑 전설로도 유명하거니와 일반형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작이다. 기단부는 몇 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상·하 대중석 각 면에는 탱주 2주가 면석을 3분하고 있으며,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옥개받침은 각층마다 5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앙화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으나 실상사탑의 상륜부를 본 따 새로 만들어 올렸다.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 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8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고 부른다.
석가탑이 2층의 기단위에 세운 3층 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반해 다보탑은 그 화려함으로 인해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는 기단은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은 그 주위로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여기에 대나무마디 모양의 돌기둥, 16장의 연꽃무늬 등을 새겼는데 돌을 깎아 세운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솜씨가 훌륭하다. 석가탑의 머리장식이 후에 복원한 것인 반면 다보탑의 머리장식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