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치인은 송년회를 통해 자신의 세를 과시했고, 어떤 정치인은 송년회를 춤추며 노래부르는 흥겨운 분위기로 만들었다. 정치인들은 한 해의 마무리를 어떻게 했을까. 사진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참석한 세종특별자치시당 송년의 밤 행사. 출처는 더불어민주당 세종특별자치시당.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지난 26일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코리아비전포럼 창립 10주년 송년의 밤’에 참석했다. 코리아비전포럼의 구성원 대부분은 원 지사를 지지하며, 정치권에선 ‘원희룡 지지단체’이자 그의 외곽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모인 참석자는 300명가량이었다. 평일 오후 6시, 제주도가 아닌 서울에서 열린 행사임에도 꽤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송년회의 소제목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희야, 내 감정을 부탁해’로 여기서 ‘희야’는 원 지사를 일컫는다. 이 자리에 제주도지사가 아닌 포럼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참석한 원 지사는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원 지사는 “정권이 보통 3~4년 차에 삐거덕거리는 것은 예상된 일인데, 촛불로 일어선 이 정권이 1년 반 만에 무너지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문재인 정권을 겨냥했다.
이곳에 참석한 한 국회 관계자는 “원 지사가 이번 송년회에서 사실상 대권 행보를 보인 것”이라며 “300명 넘게 모인 걸 봐라. 원 지사가 ‘세 과시’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날 10여 명의 국회 보좌진들도 자리에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의 국회 관계자는 “그곳에서 원 지사를 지지하는 보좌진들을 꽤 많이 봤다. 그들 모두 한국당 소속이다. 원 지사가 대선을 앞두고 한국당으로 복당할 거라 믿는다”고 했다.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수원무지역위원회 송년회’ 시작은 보통의 송년회와 비슷했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하다” “지난여름 도와주셔서 감사하고 송구스럽다”는 등 상투적인 인사말을 전했다. 이후 색소폰 연주와 노래자랑이 시작됐고, 김 의원은 마이크를 잡고 단상에 올랐다. 노래방 기계에선 ‘상하이 트위스트(설운도)’가 흘러나왔다. 김 의원은 스텝을 밟더니 음악에 맞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반주가 나오는 동안에는 춤을 추면서 행사장의 흥을 돋웠다. 김 의원은 비록 노래 반주의 박자를 맞추진 못했지만,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른 덕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단상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고 송년회는 얼마 안 가 ‘춤판’이 됐다. 이후에도 당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에서 이목을 끌었던 송년회도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참석한 송년회는 독특한 분위기로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당원 한마음 송년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12월 28일 진행된 민주당 세종특별자치시당 행사에는 2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 문제는 행사장의 디자인과 분위기였다. 이 대표가 올라선 단상에는 흰색 꽃 수십 송이가 올려져 있었고 다소 무거워 보이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사진 속 송년회의 모습은 엄숙하고 고요해 보였고, 이 사진이 공개되자 온라인에는 여러 말들이 나왔다. ‘예식장 같고 결혼식인 줄 알았다’는 반응은 차라리 나았다. ‘교주 같다’ ‘소름돋는다’ ‘분위기가 왜 저러냐’는 비판부터 ‘장례식장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흰색 꽃 더미 위에서 발언을 이어가는 이 대표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한 네티즌은 흰색 꽃 위의 이 대표에게 검정 리본을 그리며 악의적으로 조롱하기도 했고, 일부 네티즌은 “안그래도 요즘 민주당 이미지 노쇠됐는데 송년회 분위기까지 왜 이러냐”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행사를 기획한 준비위원장은 “송년의 밤 장소로 근처 예식장을 구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 같다”며 “예식장 특성상 신랑신부에만 조명이 가고, 그 외의 벽면과 디자인은 어둡게 만들어서 본의 아니게 송년의 밤 분위기가 어두워 보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흰 꽃도 우리가 놓고 싶어서 놓은 게 아니라, 예식장에 원래 있던 꽃을 우리가 굳이 치우기가 뭐해서 내버려뒀던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이해찬 대표는 이 자리에서 발언을 자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석자에 따르면 이 대표는 문재인 정권이나 민주당 중앙당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세종시에 대해서만 간략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최근 부적절한 언사로 논란을 빚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침체된 경기와 하락하는 당 지지율을 의식해 축포를 터뜨리거나 자화자찬을 하는 것이 아닌 소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대로 송년회가 ‘강연장’이 된 경우도 있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서울 구로을)은 이춘석 의원의 지역구인 전북 익산갑 지역위원회 송년의 밤에 초대를 받았다. 이곳에서 박 의원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원의 과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박 의원은 “다른 당에는 없고 민주당에만 있는 세 가지는 국민과 함께한 민주주의 역사와 존경받는 지도자, 그리고 민주당원의 축적의 시간”이라고 밝혔다.
지역구에 자신의 이름을 홍보하는 방식의 평범한 송년회도 있다. 김병기 민주당 의원(서울 동작구갑)은 12월 27일 ‘동작구 배드민턴협회 송년의 밤’에 참석했다. 김 의원은 평소에도 협회 관련 일정이 있으면 종종 지역구민들과 만나 배드민턴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위원회 주최의 송년회는 아니지만, 배드민턴협회나 ‘대방동 직능단체협의회’ 등 지역의 크고 작은 모임 송년회는 꾸준히 참석한다.
한편, ‘정치적인’ 송년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김무성 의원실 측은 “김무성 의원은 그런 성격(세 과시)의 송년회는 즐기지 않는 편”이라며 “지역구를 중심으로 한 송년회만 소소하게 참석할 뿐, 그걸 통해 정치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고 밝혔다. 국회 한 관계자도 “요즘 같은 경기에 정치인이 송년회를 주최하는 건 안 좋게 보일 수 있다”고 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