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가 낸 ‘2018년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 12월 반도체 수출액은 88억 6000만 달러로 2017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8.3% 감소했다. 반도체 수출액 감소는 2016년 9월 이후 27개월 만에 처음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재고 감축 및 생산 조절에 나선 이유다. 산업부는 반도체 수출이 감소한 것은 대형 정보기술(IT)업체의 데이터 센터 투자 조정과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 해소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D램의 시장 공급 초과율은 2017년 –4.2%로 수요보다 공급이 적었지만, 지난해 0.5%로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다.
삼성전자가 30나노급 공정을 적용해 생산한 D램. 연합뉴스
문제는 외국계 증권사가 지적해 온 반도체 고점론이 현실이 됐다는 데 있다. 그동안 국내 반도체업계는 ‘반도체 고점론’에 대해 주가를 낮춘 뒤 저가 매수하기 위한 외국계 증권사들의 전략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도체 고점론이 나올 때마다 관련 주가는 떨어졌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은 비상했다.
반도체 경기가 최고점에 이르러 이내 꺾일 것이라는 반도체 고점론은 2017년 초부터 제기됐다. 같은 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에서 40% 가까운 영업이익률을 내며 이른바 ‘반도체 슈퍼 호황’을 썼다. 반도체 고점론이 무색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음모론으로 치부됐다.
반도체업계는 이익을 줄이고 공급을 늘리는 ‘치킨게임’이 끝나 공급 과잉 가능성이 적고, 데이터 센터 등 반도체 수요는 계속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 들어 구글과 페이스북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이 데이터 센터 투자를 줄였다. 미·중 무역분쟁과 글로벌 경기 둔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에 반도체는 당초 예상과 달리 공급 과잉으로 돌아섰고, 가격 하락에 직면한 상태다. D램 가격은 2017년 12월 9.7달러에서 지난해 12월 6.8달러로 떨어졌다. 지난해 상반기 40%를 넘어섰던 수출 증가율 역시 지난해 9월부터 20%대로 하락, 지난해 12월 마이너스 성장했다.
일각에선 업계와 정부 모두 반도체 고점론에 대응하지 않은 데 따라 향후 경기 전체가 ‘반도체 쇼크’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국 경제가 반도체에 기댄 성장 착시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는 지난해 연간 수출액이 6000억 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인 6054억 7000만 달러를 기록했다고 자축했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수출 증가율은 0.6%에 그쳤다. 전체 수출액의 21%를 반도체가 차지하며 수출액 증가를 이끌었다. 반대로 얘기하면, 반도체 공급 과잉에 따른 수출액 감소가 불거질 경우 우리나라 무역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강화하고 있는 것도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세계 반도체업계는 치킨게임으로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도시바 등 3~5개 회사가 전체 공급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발 치킨게임을 앞두고 있다. 중국은 정부 차원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반도체 생산에 전념하고 있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는 전략을 내놓기도 했다. 삼성전자 한 관계자는 “중국이 기술 격차를 극복하는 3년 후쯤 삼성은 물론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중 하나는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반도체 고점론 지적에도 반도체 투자 확대로 대응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부랴부랴 재고 감축과 생산 축소를 검토하고 나섰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중순 메모리 반도체 가격 하락을 놓고 고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반도체 재고 감축을, SK하이닉스는 D램 생산 축소를 고려하는 상태”라고 했다.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밝힌 투자 계획도 줄어들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각각 올해 20%가량 투자를 줄일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최근 수출 부진을 메워줄 대안을 찾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계 증권사로 한정됐던 반도체 고점론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통계기구(WSTS)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올해 역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기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지난 2일 올해 1분기 수출 증가가 둔화하는 가운데 반도체 수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 전망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산업부 관계자는 “장관 주재 수출 점검 회의를 개최하는 등 반도체 부진 이후 수출 유지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
“반도체 고점론은 공매도 수단” 반도체 고점론이 현실화하면서 소액주주를 중심으로 공매도 음모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외국계 증권사가 부정적 보고서를 내면 공매도가 몰리고, 주가가 떨어진다는 것. 공매도는 비쌀 때 주식을 차입해 판 후 주가가 떨어지면 다시 사 차액을 남기는 거래 기법을 말한다. 지난해 반도체주 주가 급락 전 외국계 증권사 보고서가 나온 점 등이 이 같은 음모론을 부추기고 있다. 한국거래소 주가 추이 분석 결과 지난해 모건스탠리가 반도체 업황에 대한 보고서를 낼 때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큰 폭으로 내렸다. 특히 지난해 9월 5일 모건스탠리가 “반도체칩 재고 수준이 상승했다”며 ‘주의’ 보고서를 내자, 하락세로 전환 10일간 이어졌다. 보고서가 나온 이후 삼성전자 공매도 거래량은 118만 6923주로 뛰었다. 전월 한 달 동안 일평균 공매도 거래량이 46만 2837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2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 공매도 거래량은 104만 3791주로 지난해 8월 한 달간 일평균 공매도 거래량인 34만 7293주의 3배에 달했다. 공매도 제도개선주주연대 관계자는 “외국계 증권사 보고서는 기관투자자들이 본 후 언론에 보도된다”며 “정보 시차는 공매도의 유효한 수단”이라고 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2017년 초부터 반도체 고점론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면서 “투자 의견을 주의 등으로 하향 조정하는 부정적 보고서가 나올 때마다 주가 조정을 받은 것은 아니고, 지난해 하반기 반도체 수요가 줄기 시작한 게 보고서와 맞물린 것”이라고 했다. 배동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