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관, 덕수궁관, 서울관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개관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은 4관 체제를 맞게 됐다. 청주관 개관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미술관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12월 27일 청주관은 사령탑도 없이 문을 열었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이 12월 13일을 끝으로 임기를 마쳤기 때문이다. 마리 관장은 9월부터 수차례 연임 의지를 밝혔으나 문체부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새해를 맞은 현재도 관장 자리는 비어있다. 미술계 안팎에서는 이 자리를 두고 왈가왈부 말들이 많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전경. 사진=일요신문DB
마리 관장의 후임으로 선발된 최종 후보는 총 세 명. 김홍희 백남준재단 이사장,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그리고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다. 김홍희 이사장은 2006년 경기도 미술관장을 거쳐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지내는 등 공공 미술관 운영 경험이 풍부한 전시기획자다. 윤범모 교수는 한국큐레이터협회장, 한국근대미술사학회장, 우리미술문화연구소장 등을 지낸 미술 연구가다.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위원이 된 뒤 20년 넘게 세계 비엔날레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해온 전문가로 2013년에는 세계비엔날레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문제는 선발과정이었다. 당초 13명이었던 후보자에서 3명으로 최종 후보가 좁혀지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인사혁신처 측에 “최종 후보 3인에 대한 역량평가를 면제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고위공무원 나급에 해당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고위공무원단 역량평가 대상자다. 그러나 문체부 측이 “세 후보 모두 이미 해당 분야에서 직무 능력을 인정받은 전문가들로 굳이 역량평가가 필요하지 않다”며 면제를 요청한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문체부의 의중이 궁금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특정 후보 밀어주기가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공정성 논란도 커졌다. 원칙에서 벗어난 평가라는 비판 여론에 결국 문체부는 꼬리를 내렸다. 12월 26일 예정대로 최종후보 3인에 대한 역량평가를 실시했다. 이변이 없는 한 신임 관장은 연초 결정될 예정이다.
그러나 복수의 미술계 관계자에 따르면 세 후보를 둘러싼 소문은 좀처럼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세 후보가 서 있는 자리가 미술계 내부의 파벌을 가르는 기준선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홍희 이사장과 윤범모 교수가 대척점에 서 있다고 했다.
김홍희 이사장은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주류 인사로 손꼽힌다. 공공 미술관장을 지내며 쌓은 인맥과 대형 전시기획 경험이 두 후보에 비해 월등히 많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폐쇄적인 미술계에서 ‘인맥 다툼’은 곧 ‘권력 다툼’이다. 유명한 작가 몇 명을 알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지위를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홍희 이사장의 아트 파워는 막강하다”고 말했다. 일부 작가들은 김 이사장을 두고 ‘미술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미술계 카르텔’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반면 윤범모 교수의 경우 대표적인 민중미술계 인물로 분류된다. 백수남·주재환·오윤 등 1세대 원로 작가들과의 협업 전시가 다수다. 문제는 1970년 유행한 민중미술이 과거에 비해 영향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있었던 지난 정권에는 더욱 그랬다. 대부분의 블랙리스트 작가들이 민중미술인들이었다. 미술계 관계자는 “민중미술가들은 10년 가까이 미술계 주류에서 배제되어 왔다. 윤 교수의 영향력이 김 이사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장·단점이 명확히 다른 가운데 계속해서 관장 임명 논란이 일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현 정권에서 민중미술인들이 다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남북화해무드와 더불어 민중미술이 다시 각광을 받자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출신 예술인들은 공공 문화기관에 입성하기도 했다. 실제로 박종관 충북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이사장은 2018년 11월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으며 정희섭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 역시 민예총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일부 미술인들은 “문체부가 마리 관장의 연임을 거절하며 ‘한국적 정체성 확립’을 이유로 들었다. 세 후보 중 유일한 한국미술사 전공자인 윤 교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한편 비엔날레에 다수 참여한 미술계 인사는 “마리 관장의 임기가 끝났는데도 후임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급기관의 문제”라면서도 “큐레이터로의 역량 인정이 관장으로서의 능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 미술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미술관 조직을 효율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전투적 능력을 갖춘 인사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관장 인사 논란에 대해 “학연, 지연, 코드, 보은, 캠프 등에서 벗어나야 차후 논란을 피할 수 있다. 처세술과 정치력이 실력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관장 후보 3인과 홍성담 작가 묘한 인연 들여다보니… 주목할 만한 것은 세 후보 모두 홍성담 민중미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며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세 후보의 대응이 매우 달랐다. 김홍희 이사장이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재직하던 2015년 9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에서 열린 ‘예술가 길드 아트페어: 공허한 제국’ 전시에 홍성담 작가의 아크릴화 ‘김기종의 칼질’이 전시되었다. 리퍼트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었다. 해당 작품이 테러를 옹호한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홍성담 작가는 “해당 그림은 테러 옹호가 아니며 생명과 평화를 중시하는 것이 예술의 기본 맥락”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김 이사장은 홍 작가와 상의 없이 즉시 그림을 내렸다. 이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표현의 자유도 좋지만 공공미술관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건 가급적 안 하고 싶다”고 말해 미술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편 윤범모 교수는 2014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서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이 철거당하자 이에 항의하며 책임 큐레이터 자리를 내려놓아 주목받았다.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 역시 본 전시 개관에 맞춰 대표직에서 내려왔지만 당시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대중의 시선은 윤 교수에게 쏠린 바 있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