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맥락에서 올해는 기업들이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한 해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유난히도 잠잠했던 기업 수사 흐름이, 올해 역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 수사 대상 중에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제외하면, 굵직한 대기업 수사는 없을 것이라는 검찰 내 중론이다. 하지만 몇몇 기업 수사 키워드는 여전히 사정당국 주변을 맴돌고 있다. 특히 ‘유통’과 ‘갑질’에 해당할 경우, 지난해 한진그룹처럼 ‘탈탈 털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 “적폐 수사 말고는 후순위로”
“적폐 수사할 곳은 많다. 청와대도 검찰도 그렇게 생각한다.”
올해 서울중앙지검 등 굵직한 수사 대상을 묻자, 검찰 핵심 정보에 정통한 관계자 입에서 나온 답변이다. 재판거래 등 사법부 의혹 수사가 끝나더라도, 적폐라는 키워드로 풀어갈 검찰 수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얘기다. 그는 “청와대에서는 ‘적폐로 수사할 곳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얘기할 정도”라고 분위기를 귀띔했다.
검찰의 기업 압수수색. 일요신문 DB
적폐와 관련된 정황이 없다면, 자연스레 횡령 및 배임과 같은 주요 기업 비리수사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분위기다. 수도권지역에 근무 중인 검찰 고위 관계자는 “올해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얘기가 우리 귀에까지 들린다”며 “특별한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 한 기업 수사는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벌써부터 몇몇 사건의 경우 김태우 검찰 수사관 폭로 등으로 수사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났다”고 설명했다. 실제 서울에 위치한 한 지검에서는 금융권에 대한 수사를 계획했으나, 최근 경제 분위기 등을 감안해 후순위로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재경지역의 한 간부급 검사는 “특수 수사 라인의 ‘첩보 인지 수사’는 청와대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하다”라며 “대기업을 특수 라인이 나서 수사한다면 ‘기업 죽이기’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청와대도 이를 알고 쉽게 기업 수사를 지시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도 먼저 나서 기업 수사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지난해 초만 하더라도, 노조가 강한 몇몇 대기업들의 이름이 수사 대상으로 오르내렸지만 경제에 대한 우려감이 확산되면서 잠잠해진 분위기다.
# 그럼에도 예외인 삼성
하지만 예외인 곳이 있다. 바로 삼성그룹이다. 현재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라인에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유일한 대기업이 바로 삼성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송경호 부장검사)는 지난달 2차례 압수수색을 통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4조 5000억 원 규모의 분식 회계 의혹을 받고 있다.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2015년 회계처리 변경 과정에서 고의 분식회계가 있었다고 결론 내리고 검찰에 삼성바이로직스를 고발 조치했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자료 확보에 나섰다.
삼성바이로직스 고의 분식회계 의혹을 겨냥해 삼성전자 수원 디지털시티 디지털연구소(R4)를 추가 압수수색 했다. 검찰 수사팀은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고발사건 증거확보를 위해 그동안 진행해온 압수수색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관련자 한 명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고 설명했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수사 대상이 삼성전자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도 고개를 들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혐의 사건과 관련해 본사와 회계법인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지 않았냐”며 “승계에 대한 삼성 측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판단할 정황이 있다고 본다면, 단순히 바이오로직스가 아니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수사가 확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요신문 DB
특히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3차장검사로 이어지는 수사 라인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끈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속했다는 게 가장 큰 변수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관계자는 “윤 지검장과 한동훈 3차장검사가 ‘이재용 부회장이 승계를 위해 최순실에게 뇌물로 줬다’고 공소를 했는데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며 “분식회계의 고의성이 드러난다면 무조건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로까지 번질 수밖에 없다. 이제 와 다른 판단을 하기도 쉽지 않다”고 내다봤다.
# “기업 수사? 여전히 유효한 카드”
그렇다고 해서 삼성 외에 모든 대기업들이 수사 면죄부를 받은 것도 아니다. 올해 기업 수사는 ‘갑질’과 ‘공분’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진행될 것이라는 게 사정당국 IO(정보요원)들의 설명이다.
경찰 IO 관계자는 “올해 범죄 정보 수집에 있어 가장 높게 평가를 받는 것은 갑을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언이나 폭행, 혹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기업 오너 및 경영진의 비리”라며 “대기업보다는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첩보를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갑질 폭행에 엽기행각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대표적이다. 양진호 회장은 폭행 및 강요, 마약류 관리법·정보통신망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됐는데, 이는 직원 폭행 동영상이 공개된 지 열흘 만이었다.
이보다 앞선 지난해 초에는 대한항공 오너 일가가 검찰과 경찰, 국세청, 관세청 등 10곳이 넘는 사정기관의 수사를 받아야 했고, 시장 1위 교촌치킨의 창업주 권원강 회장은 권 회장의 6촌이자 회사 임원인 권 아무개 씨가 3년 전 저지른 갑질 폭행 동영상이 언론에 다시 공개되면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이처럼 언론에 노출된 단순 폭행 등 갑질에 따른 처벌과, 그와 별개로 진행되는 각종 자금 비리 수사가 병행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사정당국 IO는 “교촌치킨 폭행 영상이 공개된 뒤 여기저기 사정기관들이 교촌치킨 관련 이야기를 수집했다고 들었다. 올해는 이처럼 언론에 악재로 노출되는 게 대형 수사로 번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좋은 범죄 첩보가 있으면 좀 알려 달라. 갑질하는 유통기업이 가장 좋은 수사 아이템”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