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6급 검찰 수사관 김태우 씨, 전직 기재부 사무관 출신 신재민 씨의 연이은 폭로에 대해 청와대가 자주 사용했던 단어 중 하나가 바로 ‘DNA’다. “문재인 정부엔 민간인 사찰 DNA 자체가 없다”고 했던 청와대 관계자 멘트가 대표적이다. 한 친문 의원은 “사기업 인사 개입, 민간인 사찰과 같은 행위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이다.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DNA도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 그리고 공직사회에선 이러한 상황 인식에 대해 안일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현실을 외면한, ‘아마추어리즘’의 결과라는 지적도 뒤를 잇는다. 한 민주평화당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 그리고 여권 정치인들에게 그런 DNA가 없다고만 하면 문재인 정부는 그런 폭로에서 자유로운 것인가”라면서 “정부와 사정기관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자성이 부족해 보인다. ‘DNA’와 같은 정치적인 수사는 오히려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꼬집었다.
공직사회 시선은 더욱 차갑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공무원들은 현 정권 스탠스에 대해 문제점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중앙부처 고위 공무원은 “폭로한 사람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변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관행대로 해왔던 것을 했을 뿐이고, 또 그동안 제지가 없다가 막상 일이 터지니 적폐로 몰아버린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또 다른 부처 공무원도 “정권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와 관가가 체감하는 것 사이엔 괴리가 있다. 행정은 현실이다. 관행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한 번에 뿌리 뽑을 순 없는 노릇 아니냐. 그런데 무조건 적폐라고 몰아붙이니 자연스레 반발이 커지는 것”이라고 했다. 앞서의 고위 공무원은 “공직사회 DNA는 그리 쉽게 바뀌진 않는다. 이들의 DNA 자체가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고 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이번 폭로의 장본인들이 속했던 곳이 검찰(김태우)과 기재부(신재민)였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검찰은 문재인 정부 최우선 개혁 대상으로 꼽혔던 곳이다. 정권 출범 후 기수 파괴 인사, 과거사 정리 등으로 조직이 시끄러웠고 수사권은 경찰에 내줄 처지에 놓였다. 이 과정에서 조직 내에 상당한 불만이 누적된 상태다. 기재부는 김동연 전 부총리 시절 이른바 ‘패싱’ 논란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청와대에 대한 반발이 끊이지 않았었다.
관가에선 또 다른 폭로가 이어질 것이란 소문이 무성하다. 자유한국당이 김태우 씨 이외에 또 다른 특감반원들의 생산 첩보에 대한 확보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태우 개인 일탈이라는 프레임을 내건 여권에 대한 응수 차원이다. 자유한국당 한 의원은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의심 사례들이 더 있다. 원대 복귀한 특감반원들이 만든 첩보를 더 구하는 중”이라면서 “사실로 확인되면 개인 일탈이 아닌, 조직적 민간인 사찰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가 KT&G 사장 인선에 개입했다는 식의 추가 폭로 가능성도 높다. 포스코와 KT가 그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일부 여권 인사들이 사기업 포스코와 KT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지난해 7월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발탁될 때 정치권에선 그 배경에 대해 뒷말이 무성했다. 또 정권 출범 후 황창규 KT 회장을 교체하기 위해 여권 실세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이밖에 여러 건의 비리 파일이 이미 언론과 정치권으로 건네진 것으로 전해진다. 정권 말기 흔하게 나타나는 공직사회 정보 유출이 문재인 정부 중반기부터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그만큼, 현 정권에 대한 관가의 반발이 예상보다 심각한 수준임을 방증한다. 현 정권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김태우나 신재민보다 더 고위급 인사들의 폭로나 제보가 나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공직사회 기강 잡기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내부로부터의 권력 누수가 대통령 레임덕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위 ‘빨대’를 예방하고 색출하는 일은 향후 문재인 정부 사정라인의 최우선 업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사정당국 인사가 언급한 공직사회 기강 잡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공직사회 ‘저승사자’로 통했던 민정수석실 산하 특감반은 이번 사태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문재인 정부로선 특감반 역할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특감반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민주당의 지원사격 역시 예전만 못하다는 게 정치권의 반응이다. 오히려 민주당 내에선 “책임지는 참모가 없다”는 불만만 팽배하다. 한 친문 의원은 “6급 수사관과의 볼썽사나운 싸움이 결국 대통령에게로까지 불똥이 튀었다. 사건 초기 대응에 미숙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졌어야 했다”면서 “조국 수석이 ‘맞고 가겠다’고 했는데, 참모가 맞으면 대통령이 아픈 법이다. 참모로선 실격”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청와대 중심의 국정 운영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앞서의 친문 의원은 “청와대가 ‘DNA’ 얘기를 꺼낸 이후 다른 부처와 기관들은 뭐라 다른 할 말을 할 수가 없게 됐다. 무조건 청와대 뜻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다. 잘못된 게 있으면 덮고 가자는 기류다. 출구전략조차 세울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비문계의 한 의원은 “그동안 청와대와 친문 진영은 ‘나를 따르라’식으로 국정을 운영해왔다”면서 “이제 그 책임도 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안팎의 사정들로 인해 친문 핵심부는 ‘리스크 관리’가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친문 핵심 관계자는 “당과 청이 대통령만 바라보는 형국이다. 대통령이 인적 쇄신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친문 진영에선 문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자 민주당 ‘로열티’가 떨어진 것 아니냐는 불만도 새어나온다. 앞서의 친문 핵심 관계자는 “다음 총선에서 ‘문재인 프리미엄’을 기대하기 힘든 것 아니냐는 말이 의원들 사이에서 돈다. 문 대통령과 선을 그으려는 움직임이다. ‘문재인 개인기’에 의존했던 때를 벌써 잊었느냐. 당과 청은 별개가 아니라 수레바퀴의 양대 축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