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조선·대한조선·대선조선 등 중형 조선사는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기준 18척을 수주하는 데 그쳤다. 빅3가 정부의 해운업 지원만으로 초대형 컨테이너선 20척, 약 3조 원 규모 일감을 나눠 가진 것과 대조된다. 지난해 3분기 기준 빅3는 2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실적을 기록했고, 중형 조선사 전체 수주액은 7억 5000달러에 머물렀다.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까지 중형 조선사 10곳이 수주한 전체 선박은 탱커 16척과 벌크선 2척으로 총 18척에 그쳤다. 같은 기간 현대중공업그룹이 컨테이너선 1개 부문에서 17척을 수주한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컨테이너선 17척, 탱커와 액화석유가스(LPG)선 각각 10척, 액화천연가스(LNG)선 9척 등 총 46척을 수주했다. 특히 국내 중형 조선사 중 지난해 수주 및 건조·인도 실적을 기록한 중형 조선사는 STX조선, 대선조선, 대한조선 3곳에 그쳤다. 성동조선해양을 포함한 중형 조선사 7곳은 중형 선박 수주를 못했다.
조선업 회복에도 중형조선사는 수주가뭄을 이어가고 있다. 일요신문
조선업계는 SPP조선, 한진중공업, 한국야나세, 연수중공업, 마스텍중공업, 삼강S&C 등 7개 중형 조선소 모두 수주 ‘제로’를 기록한 원인이 선수금환급보증(RG) 미발급에 있다고 분석한다. RG는 조선업체가 선주로부터 선수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금융사 보증으로, 자본력이 약한 중형 조선사에는 선박 계약의 필수조건임에도 중형 조선사에 대한 RG 발급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시중은행은 조선업 불황을 들어 사실상 RG 발급을 중단했고, 국책은행마저 제한적 RG 발급을 진행하고 있다. STX조선만 해도 지난해 7건 수주 계약이 RG 미발급으로 취소됐다.
정부는 지난해 11월에야 ‘조선산업 활력제고 방안’을 내고 RG 발급 개선을 밝혔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고 있다. 중형 조선사 각각에 대한 신용평가 후 신용등급 A+ 조선사에 대해 최대 70억 원 지원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중형 조선사가 수주하는 탱커는 주로 재화중량톤수(DWT) 기준 5만DWT급으로 선가만 약 400억 원 규모다. 통상적으로 일반 상선을 건조하는 조선소는 선가의 최소 40% 수준인 160억 원가량 RG 발급을 받아야 수주할 수 있다. 70억 원 RG 발급 지원으로는 중형 선박 1척 수주도 어렵다. 신용등급 A+를 받을 수 있는 중형 조선사도 없는 상태다.
조선산업협회 한 관계자는 “정부가 대형 조선사 중심 지원으로 지난해 7년 만에 수주량 기준 세계 1위 자리를 가져온 만큼 중형 조선사에 대해선 전시행정만 지속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면서 “2017년 말부터 RG 발급 불안에 따른 중형 조선사 고사 상황을 제기했고 개선을 요구해왔는데 1년 만에 나온 정책 역시 실효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중형 조선사 한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해외 선사로부터 선박 건조의향서(LOI) 자체가 들어오지 않고 있다”면서 “발주를 넣어도 한국 금융기관이 지급보증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조선산업은 지난해 중형 조선사 부진에도 호실적을 냈다. 클락슨 리서치가 지난 12월 10일 발표한 결과를 보면 지난해 1~11월 누적 기준 세계 선박 발주량 2600만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 중 한국 조선사들의 수주물량은 1090만CGT(42%)로 국가별 1위를 차지했다. 수주량 세계 1위는 2011년 이후 7년 만이다. 지난해 발주된 세계 LNG운반선 65척 가운데 56척을 국내 조선 빅3가 싹쓸이했다. 같은 기간 국내 중형 조선사가 수주한 물량은 43만 6000CGT로 전체 수주물량의 4%에 그쳤다. 2017년보다 2%포인트 하락했을 뿐 아니라 10년 전보다 14%포인트 급락했다.
문제는 빅3 중심 조선업 지원이 단기 성과에는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 조선업 경쟁력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조선산업 경쟁력의 근간으로 불리는 조선기자재산업이 중형 조선소 없이는 독자생존할 수 없는 탓이다. 김영훈 경남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기자재산업을 지탱하기 위해선 대형 조선사가 얼마나 많은 수주물량을 처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형 조선사가 얼마나 많은 척수를 담당해주느냐가 더 중요하다”면서 “조선산업이 대형 조선사 위주로 재편되면 기자재산업이 죽고 기자재산업이 죽은 국가는 조선강국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업계 전문가들은 조선업이 대표적인 노동집약 산업이라는 점에서 중형 조선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00% 주문제작으로 이뤄지는 선박 건조에서 설계 자원이 머물 수 있는 토양을 중형 조선사가 마련하기 때문이다. 조선업계 한 전문가는 “연구개발(R&D)을 따로 하지 않는 중형 조선사 특성상 설계전문사가 붙을 수밖에 없고 설계전문사는 국내 조선업이 설계 전문인력을 유지하는 방안으로 꼽혀왔다”면서 “중형 조선사와 설계전문사가 줄면 노동집약 산업인 조선업에 인력이 남지 않을 뿐 아니라 유입도 감소해 기반 자체가 약해진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는 최근 RG 발급을 위한 컨트롤타워 설치를 검토하고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RG 발급 심사위원회를 두고 금융당국이 RG 발급을 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당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형 조선사가 잇달아 문을 닫기 시작하자 RG 발급을 멈췄다. RG 발급 중단은 다시 중형 조선사가 일감을 잃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2008년 27곳에 달했던 중형 조선사의 63%가 사라졌다. 현재 수주 활동을 하고 있는 STX·대선·대한조선으로만 한정하면 중형 조선사의 1%만 남은 셈이다.
조선업계 한 전문가는 “금융위기 이후 국내 중형 조선사가 죽은 이유는 은행이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계약 유도한 환율파생상품 키코(KIKO, Knock-In Knock-Out) 영향이 큰데 그때 채권자가 된 은행들은 여신 회수만 목적으로 돈 되는 건 다 팔았다”며 “은행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임에도 조선업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현재 조선업에 필요한 것은 RG 발급 컨트롤 타워보다 정부가 대형 조선사에 지원한 자금의 10%만이라도 중형 조선사를 위한 펀드로 구성해 제작금융을 지원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