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수를 배경으로 열한 마리의 학이 자유로이 노니는 모습이 잘 표현된 화접선. 조선시대. 작자미상. 57×31.7cm. 사진제공=일준부채박물관 | ||
靑山落照時(먼 산 노을에 질 때)
江南杳何處(강남 땅 어느 먼 곳으로)
一棹去遲遲(노 저어 천천히 흘러가는가)
조선조 월산대군이 부채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지은 <제화선(題畵扇)>이란 시다.
부채란 기능적으로는 그저 손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에게 그 이상으로 각별한 그 무엇이었다.
옛사람들은 부채로 햇볕이나 먼지를 막기도 하고, 만나기 거북한 상대를 보면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또한 사람을 부릴 때면 지휘봉이기도 했으며 불량배를 만나면 호신용 무기이기도 했다. 시조나 가곡이라도 한 곡 하려면 부채로 장단을 맞추며 풍류와 멋을 즐기고, 판소리의 명창이 부채를 접었다 펴면 희로애락이 생겨났으며, 부채춤에서 부채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런가 하면 부채는 그림이 그려지는 화폭이 되고 명필이 남겨지는 서첩이 돼 서화선(書畵扇)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국 부채의 기원은 고구려 안악 3호 고분 벽화에 털부채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후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부채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 추사 김정희가 그린 ‘묵란도(墨蘭圖)’. 조선 19세기. | ||
육당 최남선은 <고사통(故事通)>에서 “중국 부채는 원래 단선(둥근 부채)뿐이더니 북송 때 고려로부터 접선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중국에서도 그것을 모방하여 나름대로 만들어서 접부채가 일반화되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올수록 부채는 더욱 정교해지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조선시대 공조에서는 단오날 단오선이라는 부채를 만들어 궁궐에 올리고 임금은 그 부채를 신하나 종친, 각궁의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영호남의 지방 수령들도 명절이면 절선(節扇)이란 부채를 진상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부채는 크게 그 형태에 따라 방구부채(둥근부채)와 접부채(쥘부채)로 나뉜다.
방구부채는 부채살에 깁이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의 부채로 단선 또는 원선이라고도 한다. 부채살의 모양과 부채 바탕의 꾸밈에 따라 오엽선(오동나무잎 모양의 부채), 연엽선(연잎 모양의 부채), 파초선(파초잎 모양의 부채), 태극선(중앙에 태극 모양을 그려 만든 것), 아선(아이들이 부치는 작은 부채), 오색선(다섯 색깔로 된 부채), 까치선(부채의 면을 넷으로 나눠 각각 다른 색을 칠한 부채), 미선(물고기나 새의 꼬리 모양을 본뜬 부채) 등이 있다.
▲ 소나무 아래 사슴 두 마리가 앙증맞게 표현되어 있다. 담채화. 조선시대. 작자 미상. 35.3×53cm. 오른쪽 사진은 쌍학자수미선. | ||
그런가 하면 햇볕을 가리는 윤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맹세를 나타내는 증표와도 같았던 합심선, 상례 때에 상주의 얼굴 가리개로 쓰인 포선, 새신랑의 얼굴을 가리는 차면선, 여덟 가지 덕을 본다며 농부들이 풀잎으로 엮어 만든 팔덕선 등과 같은 특별한 부채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라도 남원 수령 오재문이 만들었다는 오골선, 조선 말기 민태호가 고안했다는 표정선, 김희옥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매우 아름다워 이것을 얻은 사람들이 구슬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옥선 등은 명품 부채로 이름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