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매 역시 조기발견이 매우 중요하다. 일찍 발견할수록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며, 환자 및 가족들의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만 치매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가족 등 주변 사람이 얼마나 빨리 징후를 포착하느냐가 관건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치매 전단계인 ‘경도인지장애(MCI)’는 몇 가지 특징적인 증상을 보인다. 만일을 대비해 다음 9가지 항목을 꼼꼼히 살펴보자.
치매도 조기발견이 매우 중요하다. 일찍 발견할수록 환자와 가족들의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진은 탑골공원에서 담소를 나누는 노인들 모습으로 기사 내 특정사실과 관계 없음. 일요신문DB
#1. 집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
흔히 ‘고향집’ 하면 떠오르는 냄새가 있다. 익숙하고 그리운 추억의 향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집에서 정체 모를 냄새가 난다면 요주의. 이에 대해 치매 전문가인 하세가와 요시야 박사는 “후각 기능 저하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전조증상”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치매가 오기 전 후각 기능이 먼저 떨어진다”는 얘기다.
가령 상한 음식물 냄새를 맡지 못한다거나 쓰레기를 며칠째 방치해두는 사례가 많다. ‘냄새가 신경 쓰이지 않냐’고 물어도 정작 본인은 이상한 줄 모른다. 이런 까닭에 청소와 환기를 하지 않아 집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다. 참고로 “분리수거하는 날을 알지 못해 쓰레기가 집안에 가득 차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2. 정리정돈이 안 된다
예전에는 깔끔한 성격이었는데, 집안이 너저분하다면? 단순히 나이가 들어 귀찮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인지 기능 저하가 원인일지 모른다. 특히 찬장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보통은 밥공기나 그릇은 포개어 수납한다. 하지만 인지 기능이 떨어지면 정리정돈을 하지 못해 어지럽게 식기가 놓여 있게 된다.
#3. 냉장고에 엉뚱한 물건을 넣어둔다
치매 초기엔 쇼핑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같은 종류의 식재료를 반복해 산다. 통조림, 과자 같은 물건을 냉장고에 넣어두는가 하면, 심지어 전화기나 예금통장 등을 냉장고에 넣고 찾아 헤맨다. 이는 판단력이 떨어져 ‘일단 중요한 것은 냉장고…’라고 뇌가 착각해 벌어지는 현상들이다. 반대로 돼지고기처럼 냉장 보관해야 할 식품을 선반에 방치하는 케이스도 있다.
#4. 요리솜씨가 예전 같지 않으며 맛이 달라졌다
요리 시간이 더디다. 동시에 자주 하던 요리 순서를 기억하지 못하면 치매를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대표적인 치매 증상으로는 ‘듀얼태스크(Dual Task), 즉 두 가지 작업을 함께 처리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걸 들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생선을 구우면서 된장국도 같이 끓였을 테지만, 치매 초기에는 불가능해진다.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요리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리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요리가 솜씨가 좋아 뭐든 뚝딱 만들었는데, 며칠째 같은 음식만 반복하는 경우도 주의해야 한다. 자신의 부모라서 객관적으로 살피지 못하고 ‘어쩌다 보니 식재료를 한꺼번에 많이 샀을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3일 연속 같은 요리’라면 역시 이상한 일이다.
또 요리 맛이 달라졌을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후각 기능 저하가 원인일 수 있다. 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미각이 둔해져 ‘강한 맛’을 찾게 된다. 그 결과 조미료를 많이 넣게 되고, 요리 맛이 진하게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후각이나 인지 기능이 저하됐을 땐 이와 달리 맛 자체가 아예 엉망으로 변한다.
#5. 금전감각이 예전과 다르다
계획성 없이 무작정 써버리는 케이스가 많다. 하세가와 박사는 “치매 환자 보호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부모의 통장에 잔액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전했다. 치매가 오면 무엇을 샀는지, 어디에 돈을 썼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6. 사소한 일에 쉽게 흥분하고 화를 낸다
전두엽 기능 저하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다. 특히 감정 조절이 어려워 불같이 화를 내는 일이 잦아진다. 이성, 논리가 통하지 않는데다 ‘뭐 그런 일로 저러나’ 싶을 정도로 쉽게 흥분한다. 또 특정 단어에 반응하는 케이스도 있다. 누군가의 이름, 특정 단어를 말하면 ‘그런 말 하지 마!’하며 짜증을 내기도 한다.
#7. 운전이 위태롭고 자동차에 흠집이 많다
하세가와 박사는 “낮에 부모님의 자동차를 잘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전신주 등에 부딪힌 커다란 상처가 아니더라도 흠집이나 작은 상처가 여러 개 나 있는지 관찰해보라”는 것이다. 주차장, 좁은 모퉁이 등에 부딪혔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면 주의해야 한다. 진지하게 자동차를 처분하거나 운전면허 자진 반납 같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8.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외출하는 걸 꺼린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화장을 하지 않는 등 이전에 비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울러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난 한편, 외출이 줄어든다. 이는 모두 기력의 문제다. 자주 외출해 지인들과 어울렸을 부모님이 하루 종일 집에서 TV만 본다는 것은 이상 신호다. 외출이 줄어들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결국 집에만 있게 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게다가 이런 생활이 지속될 경우 우울증이 생기기 쉽다. 노인의 우울증은 치매 발병률을 높이는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9.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건망증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달 만난 사람의 이름이 퍼뜩 떠오르지 않을 때다. 이는 단순한 건망증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면 치매다. 건망증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잊어버렸는지 알지만, 치매는 자신의 기억력이 상실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병이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박사는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조금 전에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빨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치매는 조기에 대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자식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치매 테스트’라는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이럴 땐 부모님 중 건강한 쪽에 부탁해 ‘나도 불안하니 함께 테스트를 받아보자’고 권하면 좋다. 또 치매가 의심이 되는 환자가 어머니일 경우 아들이, 아버지라면 딸이 설득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 ‘부모님이 뭔가 이상한데…’라고 느꼈다면 예감은 적중할 확률이 높다. 좀처럼 눈치 채지 못할 일도, 부모자식간이기에 좀 더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위 9가지 항목에 해당된다면 ‘기분 탓일지 몰라’ ‘상황을 지켜보자’가 아니라 바로 전문의를 찾아 상담을 받도록 한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